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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득 코너

베개야 미안하다 / 이광덕

부흐고비 2008. 9. 22. 18:57

 

베개야 미안하다


나무를 깎아 베개를 만들었다. 길이는 한 자 다섯 치, 폭은 다섯 치, 두께는 세 치였다. 그 베개에 머리를 고이고 누워서 드르렁 드르렁 코를 골며 아주 편하게 잠을 잤다. 그렇지만 낮에는 베개를 밀쳐놓거나 던져버렸고, 어떤 때는 궁둥이를 받치고 걸터앉기도 했다. 그날 밤에 베개가 노기를 띤 얼굴로 꿈에 나타나서는 이렇게 말했다.

“그대가 코를 골며 자는 소리가 어둠 속에서 기둥을 뒤흔들어도 나는 괴로워하지 않았고, 그대의 쇳덩어리 같은 두개골과 두꺼운 이마가 산악처럼 무겁게 나를 짓눌러도 나는 힘들어하지 않았으며, 그대가 침을 흘리고 땀을 쏟으며, 때와 기름기로 갈수록 나를 더럽혀도 나는 조금도 더러워하지 않았다. 이렇게 크나큰 수고를 베푸는 내게 그대는 되레 욕을 보이다니! 아! 이렇게도 모질게 굴다니!”

그 말을 듣고 나는 이렇게 꾸짖었다.

“너는 물러나라! 너는 나무에 불과하다. 산마루 앞뒤에는 기(杞)나무와 노나무, 소나무와 녹나무가 숲을 이뤄 위로는 하늘로 솟구쳐 구름과 해를 찌를 기세요, 아래로는 소와 말을 뒤덮을 기세다. 톱을 잡아 잘라내고 도끼를 휘둘러 찍어내면, 너 같은 물건은 하루아침에 만 개를 얻을 수 있다. 게다가 또 구불구불하고 울퉁불퉁한 특이한 재질의 목재나 상서로운 빛깔과 찬란한 광채가 나는 무늬목도 바람에 휩쓸리고 폭우에 넘어져서 꺾어지면 썩은 흙이 되나니, 그런 나무도 이루 다 헤아리지 못할 지경이다. 그런데 너만은 요행히도 사람 손에 걸렸고, 더군다나 요행히 마루 위에 올라와 머리를 떠받치는 물건으로 쓰였으니 너의 영광은 극에 달했다고 할 수 있는데, 한 때 욕을 보았다고 해서 너는 어째 그리 투정을 부리느냐? 관부(灌夫 : 漢의 인물로 吳楚의 반란 때 용맹을 떨침)도 형틀에 묶였고, 강후(絳侯 : 漢나라 개국공신)는 문서 뒷장에다 위기를 모면하는 방법을 물었으며, 이광(李廣 : 한무제 때의 명장)은 술에 취한 하급관리에게 모욕을 당했다. 화복(禍福)과 영욕(榮辱)이 번갈아 드나드는 것은 군자조차도 모면하기 어렵다. 네가 화를 내는데 어찌 너는 자신을 돌아보지 않느냐?”

말을 마치고 잠을 자다가 불현듯 자신의 허물이 떠올랐다.

“내가 베개를 꾸짖은 것이 옳기는 옳다. 그러나 내 나이 서른에 아직도 포의(布衣) 신세니, 남들이 나를 천하게 여기고 짓밟는 것이 마땅하다. 옛사람의 글을 읽은 것이 적지 않고, 천하의 이치를 탐색한 것이 얕지 않으며, 화복과 영욕의 사연을 잘 설명하여 갖추지 못한 것이 없다. 하지만 세상을 살아가며 남들이 던지는 귀에 거슬리는 한 마디 말을 들으면 금세 발끈하여 마음에 화가 나고 붉으락푸르락 낯빛이 바뀌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이렇듯이 제 자신을 다그치는 일에는 너무도 관대하면서 남을 책망할 때는 너무 가혹하게 해서야 되겠는가? 나는 선비가 돼 가지고 선비로서 할 만한 직책을 얻지 못했지만, 나무는 베개가 되어 베개로서의 용도를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다. 내가 거슬리는 말을 듣고 속이 뒤집히는 것은 참으로 망령된 짓이지만, 베개가 천대를 받고서 노기를 띠는 것은 아무리 봐도 패악한 짓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고서 베개를 들어 사람처럼 세워놓고 그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며 이렇게 말했다.

“네가 나무가 아니고 황금이나 주옥으로서 유리와 마노의 재질을 갖고 화려한 자수로 갑을 하고 비취새의 깃털로 꾸민다고 치더라도, 머리를 고이고 누워서 드르렁드르렁 코를 골며 편안한 잠을 자게 만든다는 점에서는 다 똑같다. 가져다 쓰는 데에는 귀하고 천한 차이가 없지마는 예우할 때에는 후하고 박한 차별이 있었다. 베개가 무슨 잘못이 있으랴! 내가 잘못했다. 내가 잘못했다!”

이광덕(李匡德, 1690~1748), 〈사침(謝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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