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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득 코너

부족해도 넉넉하다 / 김정국

부흐고비 2009. 2. 23. 08:44

 

부족해도 넉넉하다


자네가 쉬지 않고 집을 짓는다는 소문을 내가 서울에서 들었다네. 남들이 전하는 말이 정녕 사실이라면 차라리 그런 짓을 그만두고 조용히 살면서 하늘의 뜻에 따르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70세를 산다면 가장 장수했다고 한다네. 가령 나와 자네가 그렇게 장수하는 복을 누린다고 해도 남아있는 세월이라야 겨우 10여 년에 지나지 않네. 무엇 때문에 노심초사하며 말 많은 자들의 구설수에 오를 짓을 사서 한단 말인가?

내 이야기를 함세. 나는 20년을 가난하게 살면서 집 몇 칸 장만하고 논밭 몇 이랑 경작하고, 겨울에는 솜옷, 여름에는 베옷 몇 벌을 갖고 있네. 잠자리에 누우면 남은 공간이 있고, 옷을 입었는데도 남은 옷이 있으며, 주발 바닥에는 먹다 남은 밥이 있다네. 이 여러 가지 남은 것을 자산으로 삼아 한 세상을 으스대며 거리낌 없이 지낸다네.

천 칸 되는 고대광실 집에다 일만 종(鍾) 이밥을 먹고, 비단옷 백 벌을 갖고 있다 해도 그 따위 물건은 내게는 썩은 쥐나 다를 바 없네. 호쾌하게 이 한 몸뚱어리를 붙이고 사는데 넉넉하기만 하네.

듣자니 그대는 옷과 음식과 집이 나보다 백배나 호사스럽다고 하던데 어째서 조금도 그칠 줄 모르고 쓸데없는 물건을 모으는가?

없어서는 안 될 것이 있기는 하네. 책 한 시렁, 거문고 한 벌, 벗 한 사람, 신 한 켤레, 잠을 청할 베개 하나, 바람 통하는 창 하나, 햇볕 쪼일 툇마루 하나, 차 달일 화로 한 개, 늙은 몸 부축할 지팡이 한 개, 봄 경치 즐길 나귀 한 마리가 그것이오. 이 열 가지나 되는 물건이 많기는 하지만 하나라도 없어서는 안 되네. 늙은 날을 보내는데 이밖에 구할 게 뭐가 있겠나.

세상사 분주하고 고단하게 꾸려가는 중에 저 산수간에서 열 가지 물건과 보낼 재미를 생각하기만 하면 어느새 돌아가고픈 기분에 몸이 훨훨 날 듯하네. 그러나 몸을 빼내어 돌아갈 방법이 없으니 어쩌면 좋겠나. 내 벗은 이 점을 잘 헤아리게나.

김정국(金正國, 1485~1541), <기황모서(寄黃某書)>, 《송와잡설(松窩雜說)》 
 


 

해 설

思齋 김정국이 친구인 황 아무개에게 보낸 편지이다. 그의 문집에는 실려 있지 않고 이기(李墍)의 저서 《송와잡설》이란 야사와 그 일부가 권별(權鼈)의 《해동잡록》에 실려 있다. 황 아무개가 늙어서도 계속 집을 짓는 등 호사스럽고 욕심 사납게 산다는 소문이 사재의 귀에까지 들려왔다. 사재는 친구에게 충고의 편지를 보냈다.

아무리 좋은 집이라도 이제 얼마 누리지 못할 것을 굳이 지을 필요가 없다고 충고하고 자기를 보라고 했다. 자신은 부자는 아니지만 의식주에 부족함이 없으므로 한 세상을 으스대며 잘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여겨 불만이 없다. 그런데 자신보다도 모든 것에서 백배나 잘 사는 사람이 그것도 부족하여 더 재물을 모으려 한다면 그것은 노탐(老貪)이다.

탐욕이 나왔으니 말이지 자기도 탐욕이 있다. 무려 열 가지나 되는 많은 물건을 그는 탐낸다. 책, 거문고, 친구, 신발, 베개, 창문, 툇마루, 화로, 지팡이, 나귀가 각각 한 가지씩이다. 그는 이 물건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없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가 말한 탐욕은 반어(反語)로 들린다. 진정 여유롭고 자유로운 인생을 살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은 화려한 집을 비롯한 값비싼 물건은 아니라는 사실을 사재는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말하고 있다.

사재는 이 글의 “잠자리에 누우면 남은 공간이 있고, 옷을 입었는데도 남은 옷이 있으며, 주발 바닥에는 먹다 남은 밥이 있다네(臥外有餘地, 身邊有餘衣, 鉢底有餘食.)”란 대목에서 ‘세 가지 남은 것[三餘]’이란 말을 따다 삼여거사(三餘居士)란 호를 지어 부족해도 넉넉하게 여기는 호기와 여유를 부렸다.

안대회 (성균관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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