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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없애려다 생긴 병
내가 호서 지방에서 떠돌이 생활을 하던 때의 일이다. 하루는 삼산(三山) 이주영(李周永) 어르신께서 나부산(羅浮山)1의 집으로 찾아와 묵게 되었는데, 한밤에 나를 불러 이부자리 곁으로 오게 하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새 나는 망상이 어지럽게 일어나 밤마다 잠을 이룰 수가 없네. 지금은 또 바둑판이 눈앞에 아른거려 이렇게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으니, 마음의 병이 심하네. 병의 근원을 찾아보면 죽은 사람을 애도하느라 그런 것이요, 병이 나도록 재촉한 것은 《장자(莊子)》라네. 내가 그 책을 읽으면서 외우는 데만 힘을 쏟다가 마음이 어지럽게 되었네. 약이나 침으로는 병을 낫게 할 수 없으니, 자네가 나를 치료할 수 있겠는가?”
나는 갑작스러운 일이라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그러다 문득 예전에 이공과 비슷한 상황을 겪었던 일이 생각났다. 그리하여 내게 병이 생겼던 근원과 효험을 얻었던 처방을 낱낱이 말씀드렸다. 그러자 공이 기뻐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자네는 나보다 먼저 팔이 부러진 사람일세.2 그 전말을 기록하여 내가 병을 치료할 처방으로 삼도록 해주게.”
나는 사양하였지만 어쩔 수 없이 붓을 들고 다음과 같이 글을 지어 올렸다.
예전에 과거 공부를 하면서 문제를 풀이하는 글을 지은 적이 있었다. 마침 가을 향시(鄕試)가 멀지 않았기에 서둘러 완성하려는 마음이 앞서 조금도 깊이 연구하지 않고 붓을 들어 바로 글을 써내려가는 일을 능사로 여겼다. 많은 것을 탐하며 얻는 데에 주력하다 보니3 조급한 마음에 뒤죽박죽이 되어 몇 줄만 써 내려가도 바로 망연히 뭐가 뭔지 모르게 되었다. 이렇게 몇 달을 보내자 스스로 하찮게 여겨지고 정신이 어지러워 마치 안개 속에 있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너무나 겁이 나서 아버님께 아뢰었더니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너는 마음으로 터득하지 못하였으니 병이 생기는 것이 당연하다. 학업이란 반드시 마음으로 터득한 다음에야 착실하게 되고, 착실한 다음에야 밝아지게 된다. 밝아진 다음에야 터득하는 것이 있어 저절로 알차게 축적된 생각에서 글이 시원스럽게 나오는 법이다. 그러면 어지러울 까닭이 있겠느냐?”
이때부터 함부로 붓을 대려 들지 않고 반드시 마음으로 이해를 하여 마음이 명료해진 다음에야 썼다. 이렇게 글을 완성하고 또 잘 외우니, 정신도 날마다 조금씩 맑아졌다.
그러다가 아내를 잃고 나자 마음을 둘 곳이 없었다. 비통하고 그리운 마음에 정신이 멍해지고 눈이 침침해져서 붉은 것이 푸른 것처럼 보였다. 세상사에 아무런 관심도 없어지고 마침내 늘 외우던 옛책을 덮어버렸다.
하루는 연화당(鍊化堂) 주인이 갑자기 음식을 마련하고 두세 명의 벗을 초청하였다. 동갑의 우의를 다지기 위함이었다. 풍악을 울리고 기생들을 춤추게 하는 등 잡다한 놀이를 시키더니 나중에는 광대를 불러다 소리까지 시켰다. 광대는 계단 앞에 서서 이쪽저쪽을 보며 판을 벌였다. 처음에는 사설이 늘어지다가 갑자기 빨라지며 어조가 격앙되었다. 마침 가을이 한창이라 바람이 스산하게 불어 뜰에 나뭇잎이 날렸다.
이때부터 잠자리에 들 때마다 눈앞에서 재주를 펼치는 모습이 가물거렸다. 소매를 펼치고 목청을 높이며 장단에 맞추어 북을 치고 부채를 흔드는데 느려지는가 하면 빨라지고 기쁜 것 같다가도 슬퍼하여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어지러웠으니, 모두 연화당 앞에서 본 광경이었다. 나는 이것이 매우 싫어서 손을 휘저어도 사라지지 않고 소리를 질러도 멈추지 않았다. 힘써 저항하였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 때문에 마음이 날로 어지러워져 병이 될까봐 너무 두려웠다. 그러다 홀연 이렇게 깨닫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객사(客邪)4라는 것이구나. 마음이 제자리를 지키지 못하는 틈을 타 침입하여 맞서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는 주인의 힘이 약하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임금이 태만하고 방탕할 때 간사하고 아첨하는 신하가 함께 조정에 나오는 것과 같다. 이들을 물리치자면 덕을 닦는 것이 으뜸이다. 하지만 당장의 급박한 일을 해결하려면 어진 이를 등용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리고 경전은 우리 주인의 훌륭한 보필이다.’
그리하여 예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궁구하는 일을 일과로 삼았다. 그러자 얼마 되지 않아 광대의 허상은 점차 사라졌다.
- 정종한(鄭宗翰,, 1764-?)5, 〈책을 마주하고서(書對)〉《곡구집(谷口集)》
평양감사향연도 중〈부벽루연회도〉부분_전(傳) 김홍도 /국립중앙박물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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