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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이 독서당을 세운 뜻은?
독서당은 조선시대에 젊은 문관 중에서 재주가 뛰어난 사람을 뽑아 휴가를 주어, 오로지 학업에 전념하게 하던 서재이자 관서였다. 위치는 서울의 남쪽 옥수동(玉水洞)ㆍ한남동(漢南洞)ㆍ보광동(普光洞) 등지의 강변으로 경치가 좋고 한적한 곳이었다. 독서당의 연원은 세종대의 사가독서(賜暇讀書)에서 시작한다. 세종은 1426년(세종 8) 12월, 젊은 문신 중에 재주가 뛰어난 자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는 사가독서제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장소가 한정되었으므로 독서와 연구에만 전념하기에는 미흡하였다. 그래서 1442년(세종 24) 사가독서를 시행할 때는 진관사(津寬寺)에서 독서하게 하는 상사독서(上寺讀書)를 실시하였다. 이 상사독서는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여 집현전을 혁파함으로써 폐지되었다. 그 뒤 성종은 다시 사가독서제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자택에서 하는 독서는 내방객들 때문에 연구에 불편한 점이 많고, 상사독서는 유교정책의 견지에서 볼 때 불교의 여러 폐습에 오염될 가능성이 허다하므로 상설국가기구인 독서당을 두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1491년(성종 22) 성종은 용산에 있는 폐사(廢寺)인 장의사(藏義寺)를 수리하여 처음으로 독서당을 두고, 남호(南湖) 독서당이라 하였으며, 이후에 옥수동 일대로 옮겨 동호(東湖) 독서당이라 하였다. 독서당을 호당(湖堂)이라고도 불렀기 때문에 남쪽의 호당, 동쪽의 호당이라는 의미로 남호, 동호로 불린 것이다. 성종 때의 학자 조위(曺偉 1454~1503)가 쓴 독서당기(讀書堂記)에는 성종 때 독서당을 설치한 유래와 그 취지가 잘 밝혀져 있다.
「커다란 집을 짓는 자는 먼저 경남(梗楠 : 가시나무와 녹나무)과 기재(杞梓 : 소태나무와 가래나무)의 재목을 몇십 백 년을 길러서 반드시 공중에 닿고 구렁에 솟은 연후에 그것을 동량(棟梁)으로 쓰게 되는 것이요, 만 리를 가는 자는 미리 화류(驊騮 : 周나라 穆王이 타던 준마)와 녹이(騄駬 : 목왕이 타던 준마)의 종자를 구하여 반드시 꼴과 콩을 넉넉히 먹이고, 그 안장을 정비한 연후에 가히 연나라와 초나라의 먼 곳에 닿을 수 있는 것이니, 국가를 경영하는 자가 미리 어진 재사를 기르는 것이 이와 무엇이 다르리오. 이것이 곧 독서당을 지은 까닭이다.
「삼가 생각하건대, 본조(本朝)에 열성(列聖)이 서로 계승하고 문치(文治)가 날로 높아, 세종대왕께서 신사(神思)ㆍ예지(睿智)가 백왕(百王)에 탁월하여 그 제작의 묘함이 신명(神明)과 부합되어 “전장(典章)과 문물은 유학자가 아니면 함께 제정할 수 없다.” 하시고는, 널리 문장(文章)의 선비를 뽑아서 집현전을 두고 조석으로 치도(治道)를 강하고, 또 “의리(義理)의 오묘함을 연구하고, 뭇 글의 호양(浩穰)함을 널리 종합하려면 전문의 업이 아니면 능히 할 수 없으리라.” 하셨다. 비로소 집현전 문신 권채(權採) 등 세 명을 보내되, 특히 긴 휴가를 주어 산 절에서 글을 편히 읽게 하였고, 그 말년에는 또 신숙주(申叔舟) 등 6명을 보내어, 마음껏 즐기며 실컷 그 힘을 펴게 하셨다.
「문종께서도 이 뜻을 이어 유아(儒雅)에 뜻을 돈독히 하여, 또 홍응(洪應) 등 6명을 보내어 휴가를 주었다. 이에 인재의 성함이 한때에 극하고, 저작의 아름다움이 중국(中國)에 비기게 되었다. 지금 왕(성종)께서 위에 오르시자 먼저 예문관을 열어 옛 집현전의 제도를 회복하고 날로 경연에 앉아 문적의 연구에 정신을 두어, 유술(儒術)을 높이고 인재를 양육하니 옛날에 비교하여 더함이 있었다.
「병신년에 다시금 조종(祖宗)이 한 것처럼 채수(蔡壽) 등 6명에게 휴가를 주었고, 올봄에 또 김감(金勘) 등 8명에게 휴가를 내리되, 장의사(藏義寺)에서 글을 읽게 하고, 옹인(饔人)을 시켜 식사를 보내고, 주인(酒人)으로 하여금 단술을 담게 하고, 때로 중사(中使)를 보내어 하사물이 빈번하였다. 그리고 이내 정원(政院)에 교서를 내리기를, “마땅히 성 밖에 땅을 골라 당(堂)을 열어서 독서할 곳을 만들라.” 하셨다.
「정원에서 아뢰기를, “용산의 작은 암자가 이제 공해(公廨)에 소속되어 폐기되었으니, 잘 수리한다면 지대가 높고 아늑하고 광활하여, 장수(藏修)하고 유식(遊息)하는 장소로서 이곳이 가장 적당합니다.” 하였다. 왕이 그 청을 옳게 여기어 관원을 보내 역사(役事)를 감독하게 하여 두 달 만에 완성하였다. 집이 겨우 20칸이었으나 서늘한 마루와 따뜻한 방이 각기 갖추어졌다. 이에 독서당이라 사액하고 신에게 명하여 기문을 짓게 하셨다.
- 출전 : 조위(曺偉), 독서당기(讀書堂記), 『속동문선(續東文選)』 권14.
독서당계회도_보물제867호_서울대학교박물관
[해설]
심수경(沈守慶)이 찬(撰)한 『견한잡록(遣閑雜錄)』에, “독서당은 세종 때에 창설하였는데, 연소한 자로 문장에 능숙하고 명망이 있는 자를 뽑아서 장가 독서(長暇讀書)하게 하였다. 중종 때에는 동호변(東湖邊)에 집을 짓고, 관에서 모든 물품을 공급하여 총애가 유달랐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독서당에 대한 국가의 지원이 각별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독서당은 관리들에게 휴식 기간을 주고 독서와 학문에만 전념하게 한 제도로 현재 관공서나 대학교, 기업체 등에서 진행되는 연구년 제도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독서당의 인원수는 1426년(세종 8)부터 1773년(영조 49)까지 350여 년 동안 총 48차에 걸쳐서 320인이 선발되었다. 대제학은 독서당을 거친 사람이라야 그 임명이 가능하게끔 제도화되어 있었다. 이속(吏屬)으로 서리(書吏) 2명, 고직(庫直) 2명, 사령(使令) 1명, 군사(軍士) 2명이 있었다. 독서당은 연구기관으로써 학문적 기능을 뚜렷이 나타내고 있었으며, 옥당(玉堂)인 집현전이나 홍문관 못지않게 평가되었던 기관이었다. 운영은 국비로 하였으며, 왕들의 특별 배려에 의해 하사품이 지급되었다.
역대 왕들의 독서당에 대한 총애와 우대는 지극하였다. 독서당에는 언제나 궁중에서 만든 음식이 끊이지 않았고, 왕이 명마(名馬)와 옥으로 장식한 수레 및 안장을 하사하는 일이 많았다. 신숙주, 주세붕, 이황, 이수광, 이산해, 유성룡 등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학자들이 이곳을 거쳐 갔다. 독서당의 학자들은 강 건너편 압구정까지 배를 타고 유람하며 한강의 풍광을 즐기기도 했다. 현재에 들어와 새롭게 조성된 ‘독서당 길’을 따라 조선시대 학자들의 발자취를 쫓아가 보기를 권한다.
글쓴이 : 신병주(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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