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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부인전(灌夫人傳) / 성여학

부흐고비 2011. 8. 26. 08:24

관부인전(灌夫人傳)
성여학(成汝學) 지음 / 이웅재 해설


관부인의 본적은 玉門이다. 그 아버지는 潁陰侯요, 그 어머니는 陰麗華로, 岐山의 남쪽에서 부인을 낳았다. 어려서부터 고운 자색과 발그레한 얼굴에 붉은 입술을 지니고 있었으며 성품 또한 따사하고 보드러웠다.

대력(大曆; 당나라 代宗의 연호.) 원년에 관부인으로 봉함을 받는 행운을 얻었는데 내조의 힘이 실로 컸던 때문이었다. 부인은 말이 드물어서 평상시에는 늘 입을 다물고 살았다. 또 비구니를 동경해서 초하루만 되면 반드시 납의(衲衣)를 걸친 채 정성을 다하여 불경을 외우면서 불력의 陰騭(하늘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사람을 안정시킴)을 바랐다. 그때 猛이란 이름의 장군이 하나 있었는데 그 또한 佛者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녹림산 속에 숨어 지냈는데 민대머리에 목줄기가 튼튼했고 氣宇(기개와 도량)가 헌걸차서 자못 李克用(후당의 태조로 추존된 사람. 태어날 때부터 한쪽 눈이 작아서 獨眼龍이라 불림)을 닮은 외눈박이로 천하의 力士였다.

장군은 雞冠山의 불그죽죽한 성 가운데 자그마한 연못이 하나 있는데 그 연못의 물은 따뜻하게 솟아올라 온갖 병이 다 낫는다는 말을 듣고 연못의 주인인 관부인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하였다.

“朱猛은 머리를 조아려 두 번 절하고 말씀드립니다. 애꾸눈인 저는 맑은 덕도 없습니다만 부인의 향기로운 이름을 듣자온 지 오래입니다. 마침 제 몸에 가려움증이 있어 (부인의 연못에서) 한번 목욕하기를 원하는 바이오니 혹시라도 온탕을 허락해 주셔서 만에 하나라도 효험을 보게 된다면 부인의 바람에 감복하여 아들을 많이 낳을 수 있도록 축하해 드리겠습니다.”

부인이 거기에 답장을 보내어 말하였다.

“제가 기거하고 있는 곳이 누추하고 비록 옴팍하고 축축하긴 하오나 지난번에 임금께서 소첩에게 주관하라 하셨는데다가 거듭 칙령으로 일깨워주신 바 연못의 물을 흐리게 하지 말라 하셨기에 비록 장군님의 영이긴 하오나 부응하기는 어렵겠습니다.”

장군이 읽기를 마치자 노한 눈을 동동거리며 발끈하고 일어서서 즉시 閬州(여기선 陰囊을 가리키는 말)의 두 태수를 불러 聽令토록 하여 말하였다.

“그대들은 나의 관할 아래에 있는 바이니, 일심전력으로 이 성의 연못을 쳐부수시오.”

한밤중에 양쪽 다리가 있는 봉우리로부터 陰凌泉(外陰部)을 따라 壁門으로 치달려 들어가서 수전을 도발하였더니 부인이 시달림을 견디지 못하여 임금에게 상소하여 말하였다.

“신이 오래도록 요충의 땅에 살면서 오로지 陶鎔(陶冶鎔鑄의 준말. 훌륭한 스승 밑에서 인격을 갈고 닦음)의 직책만을 본분으로 하여 천자 제후 및 어진 재상과 이름난 장수 등이 모두 신의 공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어찌 보지한[이바지한] 바가 적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주장군은 그 성정이 강려(强戾)한데다가 욕심도 많고 膂力(완력, 체력)이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난데다가 시도 때도 없이 돌진해 들어와서 그 형세가 방휼지세(蚌鷸之勢; 도요새가 씹조개를 쪼아 먹으려고 부리를 넣는 순간 씹조개가 껍데기를 닫고 놓지 아니한다는 뜻으로, 대립하는 두 큰 세력을 가리킴)가 되었습니다. 이는 실로 벽문 안 內庭에까지 쳐들어온 도적이온 바, 청컨대 살펴 단속하셔서 그 난폭함을 그치게 하여주시옵소서.”

이에 天君이 이렇게 말하였다.

“臍中書(여기선 배꼽), 그대는 산봉우리에 거하면서 망을 살펴보는 장수로서 可할 것이니 적의 동정을 엿보도록 하시오.”

또, “黃門郞(항문), 그대는 비록 입 냄새가 있기는 하지만 본시 징을 잘 울리니 적이 만약 국경에 이르게 되면 징을 울려서 알리도록 하시오.”

또, “毛參軍, 그대는 우림위(羽林衛; 陰毛)를 거느리고 있으니 적이 만약 옥문을 범하게 되면 흑색 노끈[陰毛]을 어지럽게 휘둘러서 적의 목을 묶어서 끌고 오시오.”

또, “현(弦; 外陰部의 테두리), 그대는 방어를 맡다가 적이 만약 (膣의) 벽에 부딪치거든 힘을 모아 사로잡아 달아나지 못하도록 하시오.”

또, “갑(閘; 水門의 문짝. 곧 尿道 開口部 ), 그대는 어사가 되어 철퇴와 도끼를 쓰도록 함이 좋으리니 적과 만약 교전하게 되면 적의 골머리를 때려 부수도록 하시오.”

이렇게 직분을 나누어주고 나자 관부인이 입을 열어 혀[내음순(소음순)]를 내밀어서 감사하다고 말하기를 그치지 아니하였고, 피를 발라 동맹을 맺어 전력 수비를 다짐하였다. 이윽고 장군이 노기를 뻗치고 투구[包莖]를 벗고 몸을 솟구쳐 관문을 두들겨 부수고서 세 번 들어갔다가 세 번 물러났다 하는데 한결 같이 玉帳術에 의거하였고 앉았다가 쳐들어가고 찌르고 하는 방법이 틀림없이 龍韜法(六韜 중의 하나인 병법)에 들어맞았다. 계속하여 제멋대로 닫았다 열었다 하니 그가 향하는 곳마다 앞에 거칠 것이 없었다. 관부인은 나라의 본거지가 이미 요동을 치고 사세가 더 버티기 어려워지자 白水眞人(愛液)에게 도움을 청하기에 이르렀다. 眞人이 말했다.

“장군의 성질이 불같이 급해서 날쌔게 들어갔다가 재빨리 물러나곤 하니 에워싸고서 물을 대느니만 같지 못하오.”

부인이 그 계책과 같이 세찬 물로 (주장군을) 잠기게 했다. 장군은 머리와 몸이 흠뻑 젖었으나 수염을 치켜세운 채 自得(스스로 만족하게 여겨 뽐내며 우쭐거림)한 모습으로 죽을힘을 다하여 內地를 유린하였다. 그러나 피로가 심하여 피거품이 일 정도가 되어 창을 거꾸로 들고 돌아가게 되었다. 부인이 입 언저리에 거품을 흘리면서 크게 꾸짖어 말하였다.

“지난번에 여러 공들과 함께 천군의 명을 받들어 주장군의 머리를 취하여 천군께 보답하기를 기약했는데 장군으로 하여금 도망가게 했으니 잘못이 諸公들에게 있도다.”

곧장 천군에게 갖추어 장계를 올리니 천군이 즉시 臍中書등을 불러들였다. 네 사람이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함께 알현했는데 제중서가 먼저 천군을 대하여 아뢰었다.

“신은 산꼭대기에 잠복하여 밤낮으로 살펴보다가 장군의 군사가 움직이기에 봉화를 올리고자 했으나 문득 이불자락이 뒤치는 바람에 꺼지고 말았습니다. 이 때문에 신이 봉화를 일으키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黃門郞이 이어서 진언하여 말하였다.

“신은 항상 환난을 걱정해서 때때로 포를 쏘면서 엄중한 수비를 하면서 장군이 관문에 들어서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장군은 먼저 생가죽 주머니에 두 개의 돌덩어리[불알을 가리킴]를 담아다가 신의 귀와 뺨에다가 어지러이 들어다놓아 손발을 놀리지 못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신이 징을 울리지 못하게 된 까닭입니다.”

毛參軍이 앞으로 나와 답해 말하였다.

“신은 羽林을 가지런히 정비하고서 끈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장군은 용맹하고 날래기가 아주 뛰어나서 혹은 나아가고 혹은 물러나고 하는 형세가 심히 귀신처럼 재빨랐던 까닭에 신의 비단결 같이 약한 힘으로는 실로 묶어 잡아오기가 어려웠던 것이지 신이 진심으로 하지 않으려 했던 것은 아닙니다.”

弦防禦가 또 앞으로 나와 대답하여 아뢰었다.

“신등은 북문을 잠그는 일을 맡으면서 상호 의존하는 관계를 유지하면서 좌우에서 시위를 당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장군이 벽문으로 치달려 들어오더니 곧장 갑(閘)문의 안쪽을 침범하는데 신출귀몰하듯이 좌충우돌하느라 온몸이 땀에 흠뻑 젖어있는 까닭에 미끄러워서 붙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신의 보잘것없는 자질로서는 살아있는 채로 잡기가 어려웠을 뿐이지 명령을 받들지 않았음이 아니옵니다.”

이번에는 閘御史가 머리에 붉은 빛깔의 관[陰核]을 쓰고 우뚝 홀로 서 있다가 자못 긍지를 느끼는 얼굴빛을 하고서 말했다.

“장군이 깊이까지 들어와 전력을 다하여 싸우고 있을 때 신은 朱亥(朱亥를 合字하면 核과 비슷한 형태가 된다. 원래 朱亥는 전국시대 魏의 도살업자로 勇力이 뛰어났던 자이다. 秦이 趙의 수도를 공략할 때 趙나라가 魏의 도움을 청하자 魏의 公子 無忌(信陵君)가 나섰다. 이때 侯生이란 문지기가 朱亥를 천거했는데, 그는 秦을 포위하는 척만 하고 있던 晋鄙를 40근 철퇴로 죽여서 信陵君이 그 군사를 장악, 趙를 구원할 수 있었다)의 고사를 써서 그 뒤통수를 狙擊하였더니 곧 장군은 骨髓를 흘리면서[射精을 하면서] 관문 밖으로 뛰쳐나가 죽어버렸습니다. 오늘의 공로는 신이 다른 사람에게 크게 양보하기가 어렵겠습니다.”

天君이 말했다.

“그대의 공이 크도다.”

즉시 알자복야(謁者僕射; 謁者는 궁중에서 빈객의 접대를 맡은 벼슬인데, 그 우두머리를 謁者僕射 또는 大謁者라고 한다. 여기서는 陰核의 우리말 ‘공알’을 의미)의 벼슬을 내리고 항상 관부인의 장막 가운데에서 지내게 하였다.

부인 역시 그의 우뚝 솟아 꼿꼿함을 사랑하여 내무 행정 일체를 맡기었다. 그러나 그도 나이가 들어 늙고 말았다. 일찍이 謁者를 한번 청하여 불러들였을 적에 부인이 손으로 그이 이마를 어루만지면서 탄식하여 말했다.

“애석하도다! 謁者도 그만 쇠약해졌구려. 예전의 그 윤기 있고 불그레했던 모습은 혹 창졸간에 누렇게 변해버리기도 하고, 지난날 날카롭던 서슬은 오히려 늘어져 처지게 되었으니, 그대와 더불어 육고기를 먹던 부귀의 그 즐거움을 함께 간직하고 싶었는데 어찌 오래갈 수 있으리오?”

대답하여 말하였다. “신이 여기서 지내고 있던 중에는 일도 많았고 세월도 오래되었는데 공을 이룬 다음에는 오래 머무르는 것이 옳지 못한 일이지요.”

드디어 퇴거하여 두 골짜기 사이의 붉은 언덕[赤岸; 赤岸坡라고도 하는데 현재의 陝西省 褒水 연안에 위치해 있었던 곳이라 하기도 하고, 전설상의 지명 또는 南極을 가리킨다고도 한다. 여기서는 大陰脣을 지칭한 듯하다]에서 지내다가 생을 마치었다.

(부인의) 먼 후손들은 중국에 흩어져 살았으니 이적(夷狄)과 같은 야만인들은 그 빛남을 헤아릴 길이 없다. 다만 女人國(전설상의 扶桑國)에 살았던 사람들로서 과부는 시집가지 아니한 채 늘 딸이나 손녀로 하여금 그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고 한다.

史臣은 말한다.

“부인의 덕은 지극하도다. 따사하고 촉촉한 성품은 능히 사람의 마음을 돌아서게 할 수 있었고, 죽이고 살리는 엄정한 權道(형편에 따라 일을 처리하는 방도)가 春秋와 훌륭한 짝이 될 수 있었다. 열었다 닫았다 함에 있어서는 음양의 도리를 따랐고 받아들여서 견딤에 있어서는 대상을 용납하는 도량을 지녔으며 그 나머지 뽀송뽀송함을 이어가다가도 成德(품성이 넓어서 세상에 조화롭게 적응해 나가는 덕)을 지켜나가는 일 따위는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 뒷날 어떤 사람이 ‘부인의 작은 연못’이란 시 한 구절을 지었는데 다음과 같다.”

‘兩脚山 가운데 작은 연못 있으니
연못의 위아래론 풀숲이 무성한데
바람 한 점 없어도 하늘마저 뒤집을 듯 흰 물결 일어남은
외눈박이 붉은 용이 들락날락하는 때라.’

이 또한 여실한 기록이라 이를 만한 것이다. (大尾)

[해설]

「관부인전」은 여성의 성기를 의인화한 가전체 작품으로 송세림(宋世琳)의 「주장군전(朱將軍傳)」과 쌍벽을 이루는 작품이다. 지은이 성여학[成汝學; 1557년-?]의 자는 학안(學顔) 호는 학천(鶴泉) 또는 쌍천(雙泉)이고,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성혼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는데 특히 시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광해군 2년 (1610) 식년(式年) 진사시에 일등으로 합격, 시학교관(詩學敎官)이 되어 동몽(童蒙)에게 시를 가르쳤다.

『지봉유설(芝峯類說)』에 의하면 저자는 일찍부터 시재(詩才)를 보였던 것에 비해 거의 평생을 불우하게 보내어 60이 되도록 벼슬 하나 얻지 못하였으나 스스로 시학에 힘쓰는 한편 여항(閭巷)의 이야기를 수집하는 것을 소일거리로 삼아왔다.

「관부인전」은 그의 한문소화집인『속어면순(續禦眠楯)』에 실려 있는데, 후세인이『고금소총(古今笑叢)』과 같은 골계야담집 따위를 엮을 때는 단골 메뉴로 등장하게 된 글이다. 번역은 金昌龍의『韓國假傳文學選』을 따랐으나, 부분적인 윤문 등은 해설자가 하였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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