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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바탕 울기 좋은 곳
말을 멈추고 사방을 둘러보다가 나도 몰래 손을 이마에 얹고 말하였다.
“한바탕 울어보기에 좋은 곳이로다! 울어 볼 만허이!” <중략>
지금 요동벌에 임하였으니 여기서부터 산해관(山海關)까지 일천 이백 리 길은 사방에 전혀 한 점 산도 볼 수 없다. 하늘가와 땅 끝을 마치 풀로 붙이고 실로 꿰매 놓은 듯한데, 예나 지금이나 그저 비와 구름만이 변함없이 오갈 뿐이니, 한바탕 울어볼만한 곳이라 하겠다.
立馬四顧, 不覺擧手加額曰: “好哭場! 可以哭矣!” <중략>
입마사고, 불각거수가액왈: “호곡장! 가이곡의!” <중략>
今臨遼野, 自此至山海關一千二百里, 四面都無一點山.
금임료야, 자차지산해관일천이백리, 사면도무일점산.
乾端坤倪, 如黏膠線縫, 古雨今雲, 只是蒼蒼, 可作一場.
건단곤예, 여점교선봉, 고우금운, 지시창창, 가작일장.
- 박지원(朴趾源, 1737~1805) <도강록(渡江錄) 7월 8일> 《열하일기(熱河日記)》
1780년(정조4) 음력 7월 8일, 무더위 속에 압록강을 지나 천산산맥(千山山脈)의 청석령(靑石嶺) 고개를 넘어 광활한 요동벌판을 대면한 44세의 연암 박지원이 토로한 말이다. 지금으로부터 231년 전의 일이다.
이로부터 146년 전 병자호란이 있었고, 그 이듬해 1637년(인조15) 2월 중순의 어느 날 봉림대군은 이 청석령 고개를 지나면서 ‘호풍(胡風)도 차도 찰샤 구즌 비는 므스 일고’ 라고 읊조리며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연암의 통곡은 봉림대군의 슬픔과는 다른 데 기인한 것이고 중원 천지도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바뀐 지 오래이다. 중국은 명말의 혼란기를 극복하고 강희제의 태평을 누리고 있는 반면, 조선은 존화양이(尊華攘夷)의 춘추대의를 국시로 하여 숭정 연호를 쓰고 만동묘(萬東廟)를 만들어 임진왜란 때 입은 재조지은(再造之恩)을 갚는다며 명나라 신종(神宗)과 의종(毅宗)의 제사를 모시던 그 시절이다.
연암은 당대의 지배층인 노론 명문 출신이면서도 과거를 마다하여 출세를 뒤로하고, 양반이면서도 서얼과 상민들에게 까다롭게 지체를 내세우지 않고, 고문가이면서도 고문가답지 않은 고문을 쓴 사람이라고 소개할 수 있겠다. 또 《열하일기》는 도처에 해학과 풍자, 그리고 심오한 사유와 날카로운 평론으로 가득하여 누구나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글이지만 그 글 이면에 담긴 뜻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별로 없다고들 한다. 연암의 아들 박종채(朴宗采)와 처남 이재성(李在誠)이 그런 의사를 피력하였고, 근래 연구자들의 견해가 분분한 것 역시 그것을 말해준다. 《열하일기》의 서문을 쓴 유득공(柳得恭)과, 연암의 전기를 짓고 《연암집》을 편찬한 김택영(金澤榮)의 언급을 주의 깊게 살피는 것도 좋은 방도일 듯하다.
뭐랄까, 주자(朱子)의 글쓰기 방식이 글 속에 친절하게 생각을 다 담는 정공법이라면 연암의 전법은 글 밖에 주로 생각을 담는 게릴라식이라고나 할까. 연암은 글에서 많은 말을 하기 때문에 그 말을 다 이해하면 그 글을 다 이해한 듯도 하지만 실상은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연암이 중국의 지식인들과 필담을 하면서 천하대세의 향방을 ‘지묵 밖에서 그 그림자와 메아리를 알아채는[略得其影響於紙墨之外]’-<심세편(審勢編)> 방법으로 파악한 것과 같이, 독자 역시 글의 행간에 숨어 있는 연암의 사유 맥락을 읽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마치 오늘날 비유와 상징이란 외피에 쌓인 아름다운 시를 읽는 것이라고나 할까. 200년도 더 지난 글이지만 현재성과 개방성이 풍부하다. 《열하일기》라는 글의 산맥에 신출귀몰하는 구름이 감도는 것도 그 때문이다.
연암은 이 글에서 한바탕 울만한 곳으로 금강산 비로봉과 황해도 장연의 금사(金沙)를 더 예로 들고 있다. 저자는 29세 때 금강산을 유람하고 해돋이의 감격을 <총석정관일출(叢石亭觀日出)>이라는 작품에 담았으며, 금사는 모래로 된 산을 말하는데, 연암이 이덕무(李德懋)에게서 전해들은 곳으로, 이덕무의 <서해여언(西海旅言)>이란 글에서 그 흥취를 상상해 볼 수 있다. 이 두 곳은 바로 동해와 서해를 굽어볼 수 있는 곳이다. 연암이 동해와 서해, 그리고 요동 벌판, 바로 그 탁 트인 공간을 울만한 장소라고 말한 것은, 답답한 흉금을 한바탕 시원하게 풀고 싶다는 말이다. 이를 두고 연암은 캄캄한 어머니 뱃속에 있다가 처음으로 세상에 나와 손발을 펴고 갑갑한 마음이 풀어져 한바탕 진정(眞情)에서 울음이 터져 나오는 것이라고 문학적으로 표현해 놓았다. 운다는 것이 꼭 슬픔에서 나오는 것만이 아니라 어떠한 감정이 극도에 달해서 그렇게 된다는 담론과 함께 말이다.
한바탕 울지 않고는 풀릴 길 없는 답답한 울분과 분노를 독자 대중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해학과 풍자라는 옷을 입혀 놓은 것이 바로 《열하일기》인 셈인데, 연암을 그토록 답답하게 한 것과 통쾌한 울음으로 이끈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이것이 바로 ‘호곡장(好哭場)’의 주제이자 《열하일기》의 저작 동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연암이 제기한 문제의 원형은 지금 우리 시대에도 그대로 유효한 것이고 보면, 그의 글이 얼마나 열려 있고 그의 식견과 사유가 얼마나 깊었는지 알 수 있다. 세상은 분명 많이 변했지만 사람의 생리와 세상의 속성은 역시 잘 바뀌지 않는 것일까?
연암은 또 그때 요동 벌판을 지나며 이런 시를 남겨 놓았다.
<요동 벌판을 새벽에 지나며[遼野曉行]>
요동 벌판 그 언제나 다 지날까 / 遼野何時盡
열흘을 가도 산 하나 안 보이네 / 一旬不見山
말 머리엔 새벽 별 떠 깜박이고 / 曉星飛馬首
들판 위론 아침 해가 솟아오른다 / 朝日出田間 <映帶亭雜咏> 《燕岩集》
신선한 여명의 서광(瑞光)을 받으며 거칠 것 없는 광야를 호흡하는 시정(詩情)이 하나의 은유처럼 다가온다. 북경으로 가는 서쪽 말 머리엔 새벽 별들이 떠 있고 또 동쪽 들판에선 아침 해가 솟아오른다. 지는 별들과 떠오르는 태양, 그 얼마나 광활한 대평원의 모습인가. 이 시를 보면 과연 이제 답답한 자루처럼 생긴 조선 반도에서 만주 평원으로 풀쩍 튀어 나와, 한바탕 문장으로 울고 나서 그 후련한 마음으로 허허롭게 대야를 가로질러가는 마흔넷 연암의 모습이 잡히는 듯도 하다.
우리 문학 작품 중에 안수길(安壽吉)의 소설 <북간도>나 이용악(李庸岳)의 시 <전라도 가시내> 같은 작품은 북간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연암 이후에도 요동 벌판을 대면한 사람이 적지 않을 텐데 사유의 깊이나 정서적 충일감을 보여준 걸작이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것을 보면 문학의 승부처가 외물(外物)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정신 역량 여하에 달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게 한다. 앞으로 어느 누가 요동 벌판을 문학적으로 그려내어 우리의 진정(眞情)을 또 한바탕 울게 할 것인가?
글쓴이 : 김종태(한국고전번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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