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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이 모두 내 안에 갖춰져 있다
우리는 세상 속에서 세상을 마음속에 담고 살아간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참으로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동양학에서는 대개 세상 속에 산다는 점을 중시하면 유교 사상에 가깝고, 세상을 마음속에 담고 있다는 점을 중시하면 불교 사상에 가깝다. 그렇지만 유교 사상이라 하여 마음을 중시하지 않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전국시대 맹자(孟子)는 세상 만물이 내 안에 다 들어 있으니, 내 마음이 진실하면 이보다 더 큰 즐거움은 없다고 하여, 진정한 행복은 나의 내면에 있다고 하였다.
맹자가 “만물이 모두 내 안에 갖춰져 있다.” 하였으니, 이는 인(仁)의 본체가 지극히 큼을 비유한 말이다. 무릇 천지간에 사해(四海)와 팔황(八荒), 금수(禽獸)와 초목(草木) 등이 다 물(物)인데 인자(仁者)는 이 모두를 똑같이 보아서 자신에 속하는 것으로 여긴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나의 백성이고, 모든 이민족들이 다 나의 이민족이며, 모든 금수와 초목들도 다 나의 금수와 초목인 것이다. 나[我]란 물(物)에 상대되는 개념이니, 비록 피차의 구별을 있을지라도 내가 저 만물을 모두 포괄할 수 있고 만물 각각에 맞게 처리할 방도가 있으니, 따라서 만물이 모두 나의 마음속에 갖춰져 있어 조금도 부족한 바가 없는 것이다.
내가 만물을 접할 때 처리하는 방도가 극진하지 못하면 내 자신에 돌이켜 볼 때 필시 무언가 미흡하여 허전하게 느껴질 터이지만, 나 자신에 돌이켜 보아 부족한 바가 없다면 그 즐거움이 어떠하겠는가! 그러므로 “서(恕)를 힘써 실행하면 인(仁)을 구함이 이보다 더 가까울 수 없다.” 하였으니, 이 인을 구해서 인을 얻는 것이 이른바 “자신에 돌이켜 진실하면 즐겁다.”는 것이다.
《예기(禮記)》에 “성인(聖人)은 사해(四海)로 한 집을 삼고 중국으로 한 몸을 삼는다.” 하였는데 이는 그래도 조금 부족한 점이 있다. 《맹자(孟子)》는 여기서 개념을 미루어 넓혀서 만물을 자신에 소속시키는 데 이르렀으니, 더할 나위 없다 하겠다.
- 이익(李瀷) 〈만물비아(萬物備我)〉《성호사설(星湖僿說)》제20권 경사문(經史門)
금강산 만물상의 가을 풍경
맹자가 “만물(萬物)이 모두 나에게 갖추어져 있으니, 자신에 돌이켜보아 진실하면 즐거움이 이보다 더 클 수 없고 서(恕)를 힘써서 행하면 인(仁)을 구함이 이보다 가까울 수 없다”1 한 말을 성호(星湖) 이익(李瀷)이 설명한 글이다. 맹자의 이 말을 풀이하여 주자(朱子)는 “만물(萬物)의 이치가 나 자신 안에 갖추어져 있으니, 나 자신이 진실하면 마음이 참으로 즐겁고 남을 나와 같이 생각하면 사사로운 생각이 일어날 수 없어 인(仁)의 상태가 된다.” 하였다.
성호(星湖)는 위 맹자의 말을 인(仁)의 개념을 가지고 해석하였다. 즉, 인자(仁者)는 천지 만물을 모두 똑같이 보아서 자신에 속하는 것으로 여기므로 세상 사람은 모두 나의 사람이고, 나아가서 짐승, 초목들까지도 모두 나의 짐승, 나의 초목으로서, 모두 내 안에 포괄된다. 따라서 남은 그저 남일 뿐이 아니라 나의 남이며, 사물은 그저 사물일 뿐이 아니라 나의 사물이니, 사물을 접응할 때 자신이 할 도리를 다하지 못하면 마음이 흡족하지 못하고, 자신을 돌이켜 보아 흡족하면 마음이 즐겁다. 남이 그저 남일 뿐이라 느껴지고 사물이 내 밖의 사물일 뿐이라 느껴진다면 이는 나의 마음이 진실하지 못한 것이요 인(仁)하지 못한 것이다. 이럴 때 나의 마음은 내 안의 사물을 분리하여 타자(他者)로 인식한다. 나와 사물이 분리되면, 그 사이에 갈등이 일어난다. 이 갈등은 서(恕)를 통해 해소된다. 주자(朱子)는 서의 개념을 추기급인(推己及人)이라 하였다. 쉽게 말하면 자기의 입장을 미루어서 남을 헤아려 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마음이 사물과 접하여 하나가 되는 것이 서이니, 서가 제대로 되지 못하면 사물과 나 사이가 벌어지게 된다. 또한 서가 빠진 인(仁)은 한갓 공허한 관념에 그친다.
고전을 읽다 보면 두 번씩 놀라곤 한다. 옛 성현의 말들이 너무도 비슷함에 놀라고, 한편 서로 같은 듯하면서 너무도 다름에 또 한 번 놀라곤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유교와 불교는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생겨났고 사상도 매우 다르다. 그런데 유교와 불교의 경서들에는 흡사한 말들이 왕왕 발견되곤 한다. 그렇지만 그 말의 취지는 대개 다르다.
우리는 세상 속에서 세상을 마음속에 담고 살아간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참으로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세상 속에 산다는 점을 중시하면 유교 사상에 가깝고, 세상을 마음속에 담고 있다는 점을 중시하면 불교 사상에 가까울 것이다.
유교의 인(仁)과 서(恕)는 천지 만물을 나에게 속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데 그치고, 천지 만물과 완전히 합일한 것은 아니다. 성호가 피차의 구별이 있다고 하고 나의 사람, 나의 짐승, 나의 초목이라 했듯이 남이 아니라고 느낄 뿐 나와 만물 사이에 관계는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는 나와 만물의 간격을 단숨에 허물어 몽땅 공무화(空無化)해 버린다. 나와 남이란 개념을 아예 없애 버리는 것이다. 유교는 자기와 세상과의 관계 정립을 중시하여 삼강오륜(三綱五倫)과 같은 윤리를 중시하는 반면 불교는 세상과 자기와의 갈등을 근원에서 해소하여 완전한 해탈을 추구한다. 그래서 말은 서로 비슷하지만 그 취지는 다른 것이다.
‘만물이 모두 나에게 갖추어져 있다’고 한 말은 불교의 관점에서 보면 더 쉽게 해석할 수 있다. 유교의 관점에는 여전히 나와 만물 사이에 관계가 남아 있으니, 곧바로 생각해서는 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만물을 모두 내 안에 담아 둘 엄두가 나지 않는다. 맹자의 본의와 다르겠지만, 불교의 관점에서 맹자의 말을 해석해 보자.
불교의 사상은 어디까지나 유심론(唯心論)에 입각한다 할 수 있다. 유심론에 의하면, 우주 만물은 저마다의 실체가 있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이 빚어내는 형상이고 내 본성의 거울에 비쳐 있는 그림자일 뿐이다. 우주 만물 뿐 아니라 우주 만물을 상대하는 나도, 필경 나의 내면 의식에 비쳐진 빈 형상일 뿐이니, 나는 내 안에 또 하나의 나를 만들어서 만물을 상대하고 내 내면의 거울은 나와 만물 모두를 아울러 비추고 있는 것이다.
자, 만물을 내 안에 담고 있다고 생각해 보자. 그리고 내 안을 가만히 들여다보자. 내 안에는 만물 뿐 아니라 만물을 상대하는 또 하나의 나도 있다. 이 또 하나의 나가 바로 우리가 늘 ‘나’라고 주장하는 바로 그 나이니, 이 나를 의식하면 곧바로 세상과 간격이 생겨 만물은 남이 된다. 만물을 남으로 인식하면, 내 마음은 인(仁)하지 못하게 되고 사람과 사물을 접할 때 진실하지 못하게 된다. 자기라 주장하는 이 나가 없으면, 우리의 마음은 텅 비고 고요하다. 이 마음자리는 그저 대상을 비출 뿐 분별이 없으므로 우주 만물을 다 포괄하여도 비좁지 않으니, 피아(彼我)를 분별하는 생각만 일으키지 않는다면 만물을 다 담아도 늘 고요하고 즐겁다.
글쓴이 : 이상하 (고전번역교육원 교무처장)
- “萬物皆備於我矣. 反身而誠, 樂莫大焉; 强恕而行 求仁莫近焉.”《孟子 盡心 上》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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