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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반만 접자 / 박영희

부흐고비 2018. 8. 14. 11:03

 

우산 접듯 반만 접기로 한다


요즘 [아내]가 하는 걸 보면

섭섭하기도 하고 괘씸하기도 하지만

접기로 한다


지폐도 반으로 접어야

호주머니에 넣기 편하고

다 쓴 편지도

접어야 봉투 속에 들어가 전해지듯

두 눈 딱 감기로 한다


하찮은 종이 한 장일지라도

접어야 냇물에 띄울 수 있고
두 번을 접고 또 두 번을 더 접어야

종이비행기는 날지 않던가


살다 보면

이슬비도 장대비도 한순간,
햇살에 배겨 나지 못하는 우산 접듯

반만 접기로 한다
반에 반만 접어 보기로 한다

 

나는 새도 날개를 접어야

둥지에 들지 않던가


 

 

오만원 / 박영희

시 세 편을 보냈더니 오만원을 보내왔다/ 어중간한 돈이다/ 죽는 소리해서 응해줬더니/ 독촉 전화 잦은 <>26,000원 보내주고/ 그 길로 시장통에 가 아내의 머리핀을 고른다/ 이것도 버릇인가./ 원고료라고 받으면 늘 이렇듯/ 무엇이 되었든 하나를 남기려는 버릇이 있다/ 오천원짜리 오백원 깎아/ 머리핀 하나 사고/ 그래도 설레임 남아 아내에게 전화를 건다/ 당신이야, 나야, 우리 오늘 만리궁성에 갈까?/ 전화를 끊고 시계를 보니 5, 아직도 한시간이 넘게/ 남았다/ 소주라도 한잔 걸칠까, 아니야,/ 지 엄마만 사줬다고 딸아이가 삐치겠지/ 남은 돈 계산하다 말고 내친김에/ 석 달 전부터 점포정리를 하고 있는 신발가게로 향한다/ 점포정리?/ 정리가 어디 그리 쉬운 일이던가/ 언론을 한번 보라지/ 정치하는 놈들은 또 어떻고/ 신발장 정리도 제대로 못하지 않던가/ 값이 헐한 운동화 한켤레를 사면서도 나는/ 아내가 좋아하는 잡채밥 한그릇과/ 딸아이가 좋아하는 오므라이스 값을 먼저 계산해둔다/ 짜장면 세 그릇은 어쩐지 서러워서다//

 

 

팽이 / 박영희

옳게 한번 서보기 위해/ 아랫도리에 핏물이 든다// 채찍을 피하지 않는 저 당당함!/ 줄에 목을 매고도 포기 않는 저 뜨거움!// 일어서고 싶거든/ 한번 사무쳐보라/ 바람 같은 원한이어도 좋다/ 팽이는 서고 싶은 것이다/ 어떠한 빙판 위에서라도/ 중심을 잃고 싶지 않은 것이다//

 

 

중심 / 박영희

사람의 깊이를 모르겠다/ 어제의 얼굴이 다르고/ 오늘 얼굴이 다르다// 저렇게 넓은 집에서 어떻게 시가 나올까/ 저렇게 윤기나는 밥상에서 어떻게 소말리아가 보일까/ 저렇게 멋진 자가용을 타고 다니면서 어떻게 실직자/ 들이 보일까// 노을의 실체를 알고부터였다/ 오랫동안 헤어져 지낸 친구를 만나/ 차를 마시고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불러도/ 마음이 열리지가 않는다, 저 삶이 정말 정당한 것인지// 오죽했으면 사람의 깊이를/ 패랭이꽃에게 물었으랴/ 오죽했으면 사람의 깊이를/ 날아가는 새에게 물었으랴// 오늘도 나는 잔가지만 잔뜩 보고 돌아와/ 꽃병 가득 꽃혀 있는 장미를 들어낸 뒤/ 꽃병 안만 들여다본다// 눈물로 꽃을 키우다니…… !//

 

 

셋방살이 다섯 식구 / 박영희

사람이 잠들면/ 코에서 찬바람이 나는 것인디/ 아이 글씨/ 자는 줄 알았던 마누라 코에/ 살짜그니 손을 대본께/ 더운 바람이 나더란 말이시/ 가운데에는/ 자식놈 셋이 잠들어 있제/ 통통배 엔진처럼 가슴은 요동을 치제/ 암만 더듬어도/ 마누라가 있는 곳은 섬이더란 말이시/ 마누라는 그 섬에서/ 애타게 통통배를 기다리는디/ 그것이 워디 쉬운 일이여야제.//

 

 

즐거운 세탁 / 박영희

마지막 헹굼에 피죤을 넣다 말고/ 물끄러미 안을 훔쳐본다/ 그저께 벗어두고/ 어저께 벗어둔/ 속옷들, 너울너울 춤을 춘다/ 가느다란 어깨끈이 달린 피노키오 런닝구는/ 손바닥만한 분홍색 팬티와 한 조 되어/ 나란히 손잡고 빙글빙글 돌고/ 체크무늬 사각팬티는/ 초록색 수건과 허리 꼭 껴안고/ 휘엉휘엉 회전목마를 탄다/ 지난 가을 해운대 아쿠아리움에서 본/ 물고기들의 춤이 저러했던가/ 땟국물 쪽 빠진 마알간 수족관에서/ 지느러미를 한껏 흔들어대는 것이/ 참 싱그럽기도 하다//

 

 

곰소 잔디다방 / 박영희

채석강 다녀오다 언 몸 녹이고 싶거든/ 곰소에나 한번 들러보게/ 그곳에 가면 터미널 건너편에/ 다방 하나가 육십년대 풍경을 하고 있나니/ 자네가 들어서면 아마/ 제대로 삭은 조개젓 마담이/ 얼른 커피 한잔 끓여 내주고는/ 후라이팬에 안주 볶느라 분주할 걸세/ 고만고만한 동네 여자들 제다 불러놓고/ 주방 옆 테이블에 제멋대로 둘러앉아/ 소주잔 기울여가며 화투장 넘기고 있는 걸 보노라면/ 자네도 시커먼 커피 내치고/ 꼽사리 끼고 싶어 안달일 걸세/ 그래도 조심하게나/ 그 풍경에 넋이 나가 버스 놓친 사람 한둘 아니거든/ , 그리고 잊지 말게나/ 여기저기 구멍난 소파가 자네에게/ 뭐라고 뭐라고 수작을 부려올 텐데/ 그러거든 못 이기는 척 슬쩍 한번 물어는 보게나/ 하룻밤 묵어갈 여인숙이 어디 없겠느냐고/ 싱싱하진 않지만 곰소에는/ 갯바람에 곰삭은 조기새끼가 제법이거든//

 

 

꽃밭에서 / 박영희

봉선화 분꽃 피어 있는 꽃밭에서/ 스무살 시절을 생각해보았습니다/ 꽃밭 가득/ 온통 꽃들뿐이었습니다/ 꽃대도 이파리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서른을 생각하니/ 피어 있는 꽃들 어느덧 나이를 닮아갑니다/ 진분홍 봉선화는 나비를 부르고/ 코스모스는 잠자리를 부릅니다/ 잠시 눈을 들어 하늘을 보았습니다/ 구름인 듯 바람인 듯/ 쓸쓸하게 흘러가는 마흔,/ 마흔을 생각하니 옛사랑의 그림자가/ 꿀벌들처럼 잉잉거리며 꽃밭 주변을 맴돕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일까요/ 쉰은 온데간데 없고/ 어느새 예순이 되어버린 나는/ 꽃보다는 씨앗에 눈이 먼저 가는 겁니다/ 꽃 지는 건 두렵지 않으나/ 씨앗들 썩을까봐 장마가 염려되는 겁니다// 오늘은/ 꽃밭에서 한 생애를 다 살아버렸습니다//

 

 

동정없는 세상 / 박영희

19804월 그녀는 도주한 남편 대신 붙잡혀 사북탄광 광장에 세워졌다./ 광장에는 수 백의 남자와 그들의 아내, 낮술 냄새를 풍기는 사내도 여럿 있었다./ 그들 중 누군가 여자의 젖꼭지를 잡아당겼다./ 자궁에 담배를 집어넣는 남자도 있었고 연탄집게로 쑤셔대는 남자도 있었다./ 술에 취한 어떤 사내는 여자의 거웃을 뽑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녀는 벌 받을 짓도 지은 죄도 없었다./ 남편이 어용노조위원장일 뿐 그녀는 두 자식을 둔 어미일 뿐이었다.//

 

 

고물상을 지나다 / 박영희

저울눈금을 확인한 고물상 주인이 50원 하는 폐지를 부리다 리어카 밑바닥// 에서 젖은 라면상자 두 개를 발견하고는 이런 일이 벌써 한두 차례 아니라며 남은 이보다 빠지고 없는 이가 더 많은 노인을 다그치자 재생이 가능한 폐지를 주워온 노인네는 요 며칠 궂은 날씨를 탓하여 본다.// 아무리 슬픈 일이 있어도 고물상에서는 눈물이 젖어도 폐지가 젖어서는 안 된다.//

 

 

아내의 브래지어 / 박영희

누구나 한번쯤/ 브래지어 호크 풀어보았겠지/ 그래, 사랑을 해본 놈이라면/ 풀었던 호크 채워도 봤겠지/ 하지만 그녀의 브래지어 빨아본 사람/ 몇이나 될까, 나 오늘 아침에/ 아내의 브래지어 빨면서 이런 생각 해보았다// 한 남자만을 위해/ 처지는 가슴을 세우고자 애썼을/ 아내 생각하자니 왈칵,/ 눈물이 쏟아져나왔다/ 산다는 것은 이런 것일까/ 남자도 때로는 눈물로 아내의 슬픔을 빠는 것이다// 이처럼 아내는 오직 나 하나만을 위해/ 동굴처럼 웅크리고 산 것을/ 그 시간 나는 어디에 있었는가/ 어떤 꿈을 꾸고 있었던가/ 반성하는 마음으로 나 오늘 아침에/ 피존 두 방울 떨어뜨렸다/ 그렇게라도 향기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박영희 시인

1962년 전남 무안에서 출생,

1985년 문학무크지 『民意』3집에 「남악리」 등

10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함.

시집으로 『조카의 하늘』 『해뜨는 검은 땅』 『팽이는 서고 싶다』 『즐거운 세탁』

 

시인은 민족운동을 위해 무단으로 북한에 다녀온 혐의로

7년을 감옥에서 보낸 별난 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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