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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시인 박정만

부흐고비 2010. 5. 12. 07:58

 

1987년 여름... 두 달동안 오백병의 소주를 마시고,
삼백편의 시를 남기고 홀연히 사라진 詩人 박정만

 

출판사 고려원의 편집장이었던 시인 박정만 등 7명이 보안사로 끌려갔고, 며칠간 무자비한 취조와 구타, 고문을 당한 뒤 풀려났다. 박정만은 고문 후유증과 인간에 대한 절망감을 폭음으로 달래다가 1988년 10월 사망했다.

시인 박정만은 죽기 서너 달 전부터 곡기를 끊고 하루도 쉬지 않고 소주를 마셨다. 술의 명정 상태에서 깨고 나면 몸도 마음도 괴로우니까, 다시 취하기 위해 몸속에 소주를 들이부었다. 그는 명정 상태에서 수백 편의 시를 쏟아냈다. 그가 스무 해 동안 썼던 시보다 죽기 직전의 두세 달 동안 썼던 시의 양이 더 많았다.

박정만은 취기에서 취기로 이어지는 황홀경 속에서 시의 영감을 구하고, 접신의 경지에서 폭발적으로 시를 쏟아냈다. 그는 시의 끝머리에 시를 쓴 날짜와 시간을 적어 넣었는데, 어떤 시들은 불과 일이 분의 간격을 두고 씌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를 옆에서 지켜본 사람들은 괴로웠겠지만, 아마도 영혼의 마지막 불꽃을 소진시켜가며 시를 한 편 한 편 토해낸 그 자신은 누구보다 행복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1987년 한 해 동안 박정만은 1천병 이상의 소주를 마셨다고 했다. 최소한 하루에 3병꼴인 셈이다. 빈 소주병을 치우지 않고 조그마한 마당에 늘어놓으니 그 모습이 장관이더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 피크는 아마도 그 해 여름이었던 것 같다.

그 무렵 기형도가 중앙일보에 쓴 기사를 보면 무더위가 한창이던 20여 일 동안 소주만 1백병 이상을 마시며 무려 3백여 편의 시를 썼던 것으로 되어 있다. 그렇게 보면 박정만에게 있어서 술이란 시를 나오게 하는 어떤 묘약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박정만의 술 이야기를 기사로 쓰고, 박정만이 죽은 지 약 5개월 후인 늦겨울의 어느 날 새벽 낙원동의 허름한 극장에서 숨진 채 발견된 기형도 시인은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체질이었다. 맥주 한 병쯤이 정량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기형도 역시 술만 마셨다 하면 변화가 빨리 온다. 평소에는 늘 어둡고 쓸쓸하고 어딘가 공허한 표정이지만 술만 들어가면 얼굴이 밝아지고 말이 많아지는 것이다. 노래를 부르라고 권하면 서슴없이 뛰어난 솜씨로 노래를 불러제치곤 했다. 남보다 10분의 1의 술을 마시고도 10배의 효과를 낸 셈이었으니 경제적인 술꾼이었다고나 할까...

어쨌거나 역설적으로 말해서 박정만 말년의 좋은 시들은 모두 술의 힘을 빌어 씌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설혹 그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박정만을 죽게 한 것은 술이 분명하지 않느냐고 입을 모은다. 물론 세상 사람들이 술 때문에 죽었다고 보는 시인은 박정만 한 사람뿐만이 아니다. 1960년대 이후만 하더라도 김관식, 조지훈 시인을 비롯해서 천상병, 조태일, 김광협 같은 시인들도 모두 술 때문에 수를 제대로 채우지 못했다고 믿고 있다.

[시인세계 / 문학세계사 / 36쪽]

이마를 짚어다오,
산허리에 걸린 꽃 같은 무지개의
술에 젖으며
잠자는 돌처럼 나도 눕고 싶구나.

가시풀 지천으로 흐드러진 이승의
단근질 세월에 두 눈이 멀고
뿌리 없는 어금니로 어둠을 짚어가는
마을마다 떠다니는 슬픈 귀동냥.
('잠자는 돌' 1.2연)

한 마장의 하늘을 떠도는
떠돌이의 피를 가지고
자네, 민들레 꽃씨 같은 얼굴을 하고
어디로 어디로 흘러가는가. 

나무 그늘 돌 위에
고단하게 쓰러진 저녁 어스름.
쓸어도 쓸어도 쌓이고 쌓이는
그 수정水晶의 푸른 어스름.
('풍장 2' 1, 3연)
 

출처 : blog.chosun.com/blog.log.view.screen?userId=ohsgoat&logId=4692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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