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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나는 산골인이다 / 곽흥렬

부흐고비 2018. 12. 31. 01:55

나는 산골인이다 / 곽흥렬


수요일 늦은 밤 시간, 한 종편 TV로 채널을 맞춘다. 요즈음 인기리에 방영 중인 교양 다큐멘터리 ‘나는 자연인이다’를 시청하기 위해서다. 오늘은 젊은 시절 중장비 기사 일을 하며 전국 방방곡곡을 떠돌다, 십여 년 전 산이 좋아서 무작정 흘러들어 왔다는 주인공의 풋풋한 오지 살이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다. 시쳇말로 폭탄머리라 불리는 특이한 헤어스타일을 한 개그맨 윤택尹澤의 대담이 오달지게 재미를 더한다.

몇 해 전, 이 프로를 처음 만났던 때가 떠오른다. 쉽사리 접근을 허락지 않을 것 같은 깊디깊은 산속, 그 오지에 파묻혀 세상 소식과 담을 쌓고 자연을 벗 삼아 유유자적하며 살아가는 은자隱者의 사연이 가슴에 파고들었다. 매일같이 주위의 수다한 사람과 부대끼면서 속진에 찌들어 지내는 문명인의 모습만 접하다, 화면 속 주인공의 반문명적인 삶과 마주하는 순간 퍽 색다르고 신선하게 다가왔었다.

반복은 습관을 만들고 습관은 마음을 지배하는가 보다. 매주마다 즐겨 보다 보니 이제 그만 인이 박여버린 것 같다. 주초만 되면 벌써부터 수요일이 기다려지고, 어쩌다 무슨 일로 해서 놓치게 되는 날이면 지난번엔 또 어떤 숨은 이야기가 잠시 세상 밖으로 나왔을까 궁금하여 좀이 쑤신다.

대다수 얼기설기 엮어 겨우 비바람만 피할 수 있게 만들어 놓은 주거시설하며, 승용차조차 지나다니기 힘들 만큼 좁고 험한 길하며, 전기마저 들어오지 않는 열악한 환경이 너무도 변변찮고 옹색해 보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들은 백이면 백 현재의 생활에서 더없이 만족을 느낀다고 했다. 온갖 문명의 이기에 길들여져 사는 도시인들의 눈에는 여간 불편할 것 같지 않아 보이는 그 은둔의 삶이 무에 그리 행복할까. 처음엔 어쩐지 보여주기를 위한 연출인 듯싶어 그다지 믿음성이 가지 않았다. 그랬던 것이 회가 거듭되는 가운데 소소한 일상에서 느끼는, 문명으로는 결코 얻지 못할 그들의 참살이를 확인하고서야 내 섣부른 판단이 그동안 얼마나 편의주의에 젖어 나온 얄팍한 생각이었는지를 비로소 확연히 깨달았다.

나는 산골인이다. 물론 방송에 소개되는 자연인들보다야 현대문명의 혜택을 넘치도록 누리면서 산다. 전기가 들어오니, 그 덕분에 전화도 사용하고 컴퓨터를 만지며 인터넷도 할 수 있다. 읍내에 오일장이 서는 날이면 자동차를 타고 쪼르르 달려가서 장 구경을 즐기는가 하면, 이따금씩 새로이 생겨난 복합문화공간을 찾아 흘러간 영화를 감상하며 옛 시절의 정취에 취해 보기도 한다.

하지만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고, 하나를 잃으면 하나를 얻는다고 했던가. 산골에서 생활을 하다 보니 일상사가 도시인의 삶에는 아예 견주는 것 자체가 우스울 만큼 비문명적인 수준이다. 마을버스가 들어오기는 해도 하루 겨우 몇 대에 지나지 않고, 해종일 있어 봐야 사람 하나 구경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중국음식점이 멀리 있는 탓에, 이른바 국민먹거리로 불리는 짜장면이며 짬뽕 같은 음식을 배달해 먹는 소소한 즐거움은 애당초 접었다. 신문 같은 읽을거리도 그렇다. 원거리라는 이유로 직접 배달해 주지 않고 우편으로 보내니, 일 년 삼백예순날을 늘 ‘신문新聞’이 아니라 ‘구문舊聞’을 보게 되는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비록 여건이 이러함에도 나는 지금의 상황에 전혀 부족함을 모르고 지낸다. 산골로 삶터를 옮겨 오면서 생활의 편리를 잃은 대신 심신의 안식을 얻었다. 도시에 살 때보다 이런저런 문명의 이기들과는 훨씬 멀어졌지만, 그 반대급부로 벌 나비 등속의 곤충이며 꿩이나 고라니 같은 동물 이웃이 새로 생겼다. 그들도 사람이 그리운지 나하고 눈이 마주쳐도 빤히 바라다볼 뿐 달아날 생각을 않는다. 어쩌면 이 원주민들로부터 함께 지내도 좋을 벗으로 인정을 받은 것 같아 내심 흔흔한 기분에 젖는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도시의 밤하늘에서는 이미 전설이 되어 버린 별들을 눈이 시리도록 바라다보며 저 먼 미지의 세계를 상상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별 하나에 추억과/별 하나에 사랑과/별 하나에 쓸쓸함과/별 하나에 동경과/별 하나에 시와/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라고 읊은 윤동주의 시구를 음미하기도 하고, “저 별은 나의 별 저 별은 너의 별” 이렇게 노래한 유행가 가사를 마음속으로 조용히 읊조려 보기도 한다. 밤이 깊어질수록 별들은 더욱 초롱초롱 빛나고, 그 순간 내면으로부터 새삼 동심의 나래가 펼쳐지면서 아련한 추억에 빠져들게 된다.

텃밭에서 갖가지 채소를 직접 길러 먹는 즐거움 또한 여기서 빠질 수 없다. 마트에 가면 지천으로 널린 것이 농산물이지만 어디 내 손으로 기른 것만 하랴. 수확의 기쁨에서 오는 뿌듯한 성취감이야 말할 나위도 없으려니와, 씨 뿌리고 싹이 돋아 하루하루 자라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도 그에 못잖게 잔잔한 감동을 선사해 준다.

물 좋고 정자까지 좋은 곳이 어디에 있겠는가. 누구는 도시의 삶을 절대 포기하지 못한다고 하지만, 나는 산골에서 지내는 지금의 삶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련다. 천석고황泉石膏肓이라고 했던가. 비록 자연 사랑이 지독한 나머지 고질이 될 지경까지는 아니더라도, 세월이 흐를수록 산골에 대한 내 애착은 점점 더 깊어만 갈 것 같다.

그러고 보면 누가 뭐래도 나는 천생 산골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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