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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낯선 풍경 / 변종호

부흐고비 2019. 6. 23. 23:07

낯선 풍경 / 변종호

늦은 귀갓길에 갑자기 몸이 신호를 보내온다. 저녁에 먹었던 음식이 문제를 일으켰는지 속이 거북스러웠다. 집에 도착해 안정을 취했지만 가라앉지 앉았다. 미심쩍은 생각에 혈압을 재보니 위험단계를 넘나드는 수치였다. 십여 분 안정을 취한 후 다시 측정하니 더 올랐다. 순간 재작년 썩은 나무 등걸처럼 나동그라지던 지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금방이라도 뇌혈관이 터질 것 같은 방정맞은 상상이 뒤따랐다.
한밤 중 종합병원 응급실은 북새통을 이룬다. 위급한 환자들만 모였으니 느긋하게 기다릴 수가 없다. 자기를 먼저 봐 달라고 아우성을 치지만 간호사나 당직의사들은 한눈에 환자의 경중輕重을 파악하는지 끔쩍도 않는다. 이미 응급실의 상황에 이골이 난 게다.
사연도 가지가지다. 싸우다 머리가 터져 선혈이 낭자한데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만취환자. 전복사고를 낸 여성운전자는 술은 마시지 않았다며 측정을 거부하다 피를 뽑아야 했다. 고열로 고통당하는 서너 살배기 사내아이는 악을 쓰며 울어댄다. 일주일간 배변을 보지 못한 이십대 청년은 맹꽁이배를 끌어안고 아파죽겠다며 의사를 불러달라고 엄살을 부린다. 구두코가 하얗게 벗겨진 의사가 왔다.
“관장약을 넣었으니 15분간은 항문이 열리지 않게 꽉 틀어막고 있어야 합니다. 환자가 고통을 호소해도 절대로 놔선 안 됩니다.”라는 말에 난감해 하던 흰머리칼이 성성한 아버지의 표정이 왜 그리도 우습던지 나는 그만 담요를 뒤집어쓰고 말았다. 딸아이가 창피하다며 다리를 꼬집어도 웃음이 멈춰지지 않았다.
집에서 나올 때만 해도 큰 병일 거라는 생각에 마음을 졸였었다. 하지만 응급조치를 받고 조금 살만하니 옆 사람들을 살필 여유가 생겼고 이렇게 웃을 수 있다는 게 놀랍기만 했다.
난생처음 팔뚝에 링거 바늘이 꽂혔다. 뭔지도 모를 투명한 액이 가끔 한 방울씩 떨어져 혈관으로 스며든다. 피를 뽑을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누군가에게 베풀며 사는 것이 남자의 도리라고 생각했는데 나도 도움을 받아야 하는 나약한 존재라는 사실이 씁쓸하다. 게다가 한 됫박도 되지 않는 저 액체가 혈관 곳곳을 누비며 나를 도와준다는 생각을 하니 헛웃음이 나왔다.
노상, 생자필멸生者必滅을 들먹였다. 세상에 빚진 것도 집착하는 것도 없으니 훌훌 털고 가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시기야 알 수 없지만 죽음을 당당히 맞겠다고 큰소리 친 것은 호기豪氣였음이 여실히 드러났다. 병원에 누워있으니 한없이 마음이 약해진다. 피곤에 지쳐 퇴근한 아내의 얼굴이 오늘따라 까칠하다. 늘 가까이에 있어 소중한 줄도 모르고 지내는 요즘이다.
지금 곁에서 간호를 하고 있는 딸아이와도 바쁘다는 핑계로 여행을 떠난 적이 언제인지 먼 추억이 되어 버렸다. 툭하면 일터로 불러내 잔일이나 시키면서도 당연시 여겨 용돈 한번 두둑이 챙겨 주지 못했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이 오지 않는다. 얼마나 지났을까 양 눈에 졸음을 그렁그렁 달고 까치집머리의 의사가 나타났다. 일찍 병원을 찾아온 것은 잘했다며 현재 특별한 문제는 없지만 정확한 검사를 위해 MRI를 찍어보자고 한다.
새벽4시가 넘어서자 응급실 풍경은 눈에 띄게 움직임이 굼떴다. 집이 그립다. 결코 융화融和되기 어려운 응급실, 생명을 연장하기도 하고 안타깝게 떠나보내기도 하는 곳이다. 각기 다른 절절함과 염원이 서려있고 살려는 이와 살리려는 사람들의 끊임없이 긴장하며 생사生死를 가름하는 치열한 공간이다.
다시는 찾고 싶지 않은 이 낯선 풍경 안에서 나는 가족과의 평범했던 일상을 간절히 그리워하고 있다. 침대에 엎드려 곤하게 자는 아내의 휴대폰에 문자를 남겼다.
“우리 여행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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