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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손수레 / 박태칠

부흐고비 2019. 9. 24. 10:29

손수레

박태칠
제10회 연금수필문학상 최우수상

수목원 안의 도로는 양편에 줄지어 선 느티나무로 인하여 녹음의 터널을 이루고 있다. 나는 손수레를 끌고 약용식물원으로 간다. 손수레에는 비료 포대가 가득 실려 있다. 명예퇴직 후 처음 잡은 일자리, 수목원의 숲 코디네이터가 된 지도 이제 3개월째 접어든다. 도로변의 스프링클러에서 물이 분수처럼 시원하게 쏟아진다. 물줄기를 보니 옛날 생각이 난다.


"요만큼이라도 한 달에 한 번씩 쌀이 나오는 구멍이 있으면 좋겠다."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와 산길을 걷다가 옹달샘으로 흘러들어오는 물을 보고 아버지는 한탄했다. 그 조그만 샘에는 누군가가 설치해 놓은 작은 대나무 통로를 타고 가늘게 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곳에는 다 퍼내봐야 한 양동이도 되지 못할 맑은 물이 고여 있었다.


그땐 그만큼 절박했다. 아버지는 엿장수였다. 젊을 때는 교단에 서기도 하였고, 도시에서 사업을 하기도 했지만 모두 실패한 후 아버지는 무작정 시골로 홀로 가서 첩첩산중에 자리를 잡았다. 귀가 어두워 말귀를 거의 못 알아듣는 어머니와 나를 포함한 어린 여동생까지 시골로 따라오자 가족을 먹여 살릴 방법이 없었다. 법관을 그만두고 엿장수를 할 수밖에 없었던 효봉 스님처럼 아버지는 엿을 팔아야 했다.


하루를 벌어 하루를 먹고 살아야 했던 당시, 아침에 엿 한 목판을 손수레에 싣고 나가면 나는 어린 여동생을 업고 아버지를 기다렸다. 마침내 서쪽 하늘에 노을이 붉게 물드는 저녁이면 멀리서 아버지의 손수레가 나타났다. 그 낡고 비좁은 손수레에는 고철과 헌책 가지 같은 것도 실려 있었지만 하루치 땔감인 솔가비와 썩은 등걸도 같이 실려 있었다.


그러나 나의 눈길은 목판 위의 어른 주먹만 한 보자기에 가 있었다. 대충 매듭지어진 그 보자기에는 하루치 쌀이나 보리쌀 같은 곡물이 들어 있었다. 혹여 그것이 쌀자루였다면 나는 냉큼 그 쌀자루를 들고 "와! 쌀이다"라고 외치며 아버지보다 먼저 마당으로 뛰어 들어오곤 하였다. 그런 생활이니 아버지와 손수레는 일 년 삼백육십오 일을 하루도 쉴 수 없었다.


그 손수레, 아버지의 그 손수레는 워낙 작고 낡아 뼈대만 제 것이고 널빤지는 죄다 덧댄 것이었다. 그 손수레가 우리 가족의 유일한 재산이자 밥줄이었다. 그러나 나는 커서 절대로 아버지처럼 손수레를 끌면서 살지는 않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 그리고 그 다짐대로 나는 커서 용하게 도시의 말단 공무원이 되었다. 혼인도 하고 변두리 한 귀퉁이 단칸 사글셋방에 부모님까지 모신 일곱 식구의 가장이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처럼 가진 것이 너무 없어서 밤낮으로 열심히 뛰어야 했다. 그리고 불혹을 한참 넘어 겨우 집 마련을 하고 초급 관리자가 되었다. 그러나 너무 힘을 쏟아 부은 탓일까? 마침내 나는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25년의 직장생활, 며칠을 망설이다가 결국 나는 명예퇴직을 신청하였다.


약용식물원에 도착하자 비료 포대를 내려 작은 화단에 골고루 뿌려준다. 별로 크지 않은 화단이다. 요만큼 '손바닥만 한 논'이라도 가져보기를 평생 소원하다 아버지는 생을 마감했다. 그만큼 '쌀 나오는 구멍'이 아버지에게는 절실했다. 직장을 그만 둘 때 연금이냐 일시금이냐를 두고 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한 번도 만져보지 못한 거액과 은행이자를 생각하면서 일시금의 유혹에 살짝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연금을 선택했다. 비록 정년퇴직자들보다는 적지만 '쌀 나오는 구멍'을 소원하던 아버지의 뜻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꾸준하고 정기적으로 나오는 연금은 나에게 미래를 계획할 시간을 주었다. 연금 덕분에 나는 건강회복은 물론 숲과 관련된 다양한 자격증을 취득하게 되었다. 결국 나는 인생 이모작인 재취업을 수목원으로 선택하였다. 그건 또 하나의 '쌀 나오는 구멍'이기도하지만 수목과 꽃향기 속에서 노동을 통한 '건강을 제공하는 구멍'이기도 했다. 이제 나는 아버지처럼 손수레를 끌고 아버지가 다니던 시골 산길처럼 수목 사이를 걸어 다닌다. 몸과 마음도 훨씬 건강해졌다.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으려 했던 아버지였지만 결국 나는 아버지를 따라 걷고 있는 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오늘날의 내가 있게 된 것은 아버지의 손수레 덕분이었다. 연중 쉬지 않고 움직인 손수레에서 나오는 헌책은 소울음소리만 들리던 그 산중에서 내게 중요한 지식의 원천이었다. 저녁 늦게 손수레를 몰고 집에 들어온 아버지는 내가 읽을 만한 책들을 골라 툭툭 털어주곤 하였다. 그 책들로 인해 나는 시골에서 몇 안 되는 국립 대학생이 되기도 하였고 공무원도 할 수 있었다. 그러니 그 손수레야말로 약식과 땔감뿐 아니라 지식까지 공급해준 우리 가족의 희망이었다.


비료를 다주고 나서 잠시 쉴 겸 나무에 기대앉는다. 맞은편에 하얀 꽃을 피운 나무들이 보인다. 이팝나무다. 꽃을 피우면 이밥 같다고 해서 이팝나무라고 이름 지어진 나무, 문득 그날의 일이 떠오른다.


그날, 비가 한 삼 일째 내리던 아침이었다. 비가 오면 엿이 젖기에 아버지는 쉴 수밖에 없었다. 전날은 멀건 수제비로 두 끼만 먹었고 아침은 굶은 터였다. 아침부터 아버지와 어머니의 부부싸움이 크게 벌어졌다. 가난한 집안에 어찌 다툼이 없으랴만은 그 날은 좀 심했다. 결국은 나도 휩쓸리게 되었고, 어쩌다가 어머니 편을 들었다. 아버지는 가족을 상대로 외로운 싸움을 했다. 다툼이 길어지자 담장 너머로 이웃 사람들이 고개를 내밀어 구경하더니 마침내 집주인이 찾아왔다. 그는 아버지를 따로 부르더니 집을 비워 달라고 했다. 동네가 창피하다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고립무원이었다. 청각장애로 영문을 모르는 어머니는 계속 언성을 높였지만, 아버지는 팔다 남은 엿을 싣고 말없이 문밖을 나섰다. 그때 나는 보았다. 비에 젖으며 굴러가는 손수레와 아버지의 한 손이 눈가로 가는 것을….


그 날 학교에 갔다 오니 어머니는 냉골인 방에 누웠고 방구석에는 보시기 하나가 놓여 있었다. 뚜껑도 없는 보시기에는 하얀 쌀밥이 담겨있었다. 아버지가 갖다 놓은 것이라고 동생이 말했다. 동생과 나는 정신없이 밥을 먹었다. 그리고 먹다 보니 알게 되었다. 두 덩어리의 밥이 한 그릇에 담겼다는 것을. 그 날 아버지는 어디로 가서 밥을 구해 왔을까?


그때의 의문은 사십 년이 지난 후에야 우연하게 답을 얻게 되었다. 작년 어느 날, 시골 친구의 부친상을 당해 장례식장에 간 일이 있었다. 이미 지천명의 나이가 된 친구와 나는 어린 시절 본 어른들의 모습을 이야기하였다. 그러다가 우연히 친구는 우리 아버지의 이야기를 하였다.


하루는 친구가 사는 동네에 아버지가 와서 엿을 팔기에 친구의 모친이 엿을 좀 사러 갔더니 아버지가 밥이 있으면 좀 달라고 하더란다. 그제야 아침 굶은 낌새를 알아차리고 모친이 황망하게 부엌으로 안내하여 식은 밥을 드렸더니 급히 드시다가 반쯤 남기더란다. 왜 밥을 남기느냐고 물었더니 집에 식구들은 굶고 있는데 차마 혼자 다 먹을 수가 없으니 미안하지만 남은 밥을 좀 가져 갈 수 없느냐고 하더란다. 안 된 마음이 든 모친은 급히 옆집에서 먹다 남은 밥까지 얻어 와서 한 그릇을 만들어 아버지 손수레에 실어 드렸다고 한다.


그 날이 그 날이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왜냐하면 그 날 외에도 종종 부부싸움이 있었고 비가 한 이틀 내린 날은 아침을 굶는 때가 허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친구에게 그때의 이야기를 들은 후로 나는 자주 아버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나도 때로는 가족 중 누군가와 언쟁을 벌이면 직장에 와서도 종일 기분이 우울하고 가장의 기분을 몰라준다고 섭섭한 마음이 든다. 그런데 어머니와 자식인 나까지 대항하였던 그날, 아버지의 마음은 얼마나 섭섭했을까를 생각하니 자괴감이 든다.


그리고 집 없는 설움 당해본 사람은 안다. 오랜 세월 셋방을 전전하였던 나는 집주인이 방값만 올려달라고 해도 서러움을 느끼곤 하였다. 그런데 집주인이 나가달라고 했을 때 그 참담한 심정을 아버지는 어떻게 삭였을까? 주린 배를 잡고, 비를 맞으며 엿을 팔러 나가야 했던 아버지의 힘든 걸음걸이와 삐그덕거리며 밀려가는 손수레가 자꾸 떠오른다.


가슴을 울컥 치밀어 오르는 슬픔은 그것만이 아니다. 현재의 나보다가 십년은 젊었을 아버지가 남의 부엌에서 밥을 얻어먹는 모습과 가장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남긴 밥을 보시기에 담아 허겁지겁 집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떠올리면….


이팝나무가 갑자기 흐려져 보인다. 근로자들이 식당 쪽으로 걸어가는 것이 흐물흐물하게 보인다. 시간을 확인하러 휴대전화를 보니 문자 메시지가 와있다. 연금이 입금되었다고 한다. '쌀 나오는 구멍'을 통해 아버지가 쌀을 보내준 모양이다. 누군가 가까이 오는 발자국 소리를 듣고 나는 얼른 손수레 옆으로 고개를 숙여 눈가를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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