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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니 / 유경환
어머니와 나, 이렇게 단 둘만의 자리가 되자 어머니는 오래 망설여온 듯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아범아, 거 건환이 친구인 치과의사 ㅇㅇㅇ가 있잖니? 하도 이가 아파 가서 알아 봤더니 한 30만원 든다더구나."
마주한 어머니의 얼굴에서 이 한 마디가 얼마나 어렵게 나왔는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참으로 어머니와 마주한 자리, 늦은 나이에 밖에 나가 공부라고 한답시고 객지생활을 하다가 돌아와 그 옛날 내가 소년이었을 적처럼 마주한 자리였다.
건환이는 이민을 간 동생이다. 늘 우리 집에 놀러오던 동생의 친구가 치과의사가 되었다. 어머니는 몇 년 전부터 이 동생 친구네 치과에 다니셨다. 그런데 오래된 틀니가 어머니 말대로 하면 '고장이 난 것'이다. 그래 다시 해 넣는데 그런 돈이 든다는 것이다. 밖에 나가 모르고 지내는 동안 어머니는 틀니 때문에 고생하신 것이 분명했다. 그래 자식이 돌아온 지 몇 달 만에 기회를 보아오다 넌지시 말을 꺼내신 것이다.
"제가 해드릴게요."
우선 이렇게 답했다. 좀처럼 자식 앞에서 돈 얘기는 안 꺼내는 어머니다. 그런데 어찌 대답이라도 시원스레 안 해 드릴 수가 있겠는가. 어머니는 조금 부끄럼 타는 기색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고 나서, 어느 한 개만 갈 수가 없어 아랫 틀니 전부를 새로 해야 한다는 설명을 덧붙이셨다. 그게 목돈이 된다는 사연이다.
이게 지금부터 만 10년 전이다. 아마 지금 틀니를 하자면 한 3백만 원쯤 들지 않겠나 싶다. 어머니는 내 말 한 마디를 믿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 뒤로는 다시 틀니값을 꺼내지 아니하셨다.(나 몰래 얼마나 눈치를 살피셨을까.) 시원스러운 내 대답과는 달리, 나는 이 목돈을 선뜻 해드리지 못했다. 원고를 써서 목돈이 되면 드리려고 저금통장까지 따로 만들었지만 끝내 해드리지 못했다. 다달이 조금씩 월급에서 떼어드리는 생활비 외에 따로 목돈 30만원을 마련하기가 그때엔 그렇게도 힘들었을까?
약속을 넘긴 지 1년 만에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지방 세미나에 갓다가 연락을 받고 밤새껏 달려왔으나, 이미 어머니의 영혼은 날아간 뒤였다. 그때 어머니는 만 여든이셨다. 이상하게도 어머니가 가신 지 3년 뒤에 아버지도 같은 나이 여든으로 가셨다. 만일 어머니가 좀 더 사셨다면 아버지도 좀 더 사셨을 것이다. 어머니는 병상에 눕지도 않고 나다니시다가 어느 날 아침 잠든 듯이 누워 가셨다. 그렇게 갑작스레 가신 것은, 어머니의 틀니 때문인지도 모른다. 제대로 잡수시지 못해 기진하여 가신 것으로 밖에는 달리 풀이가 안 된다.
문상객들은 내게 호상이라고 위로의 말을 한 마다씩 던졌으나, 그러나 약속을 못 지킨 죄책감으로 속이 몹시 쓰렸다. 해가 바뀌고 바뀌어 어머니가 가신 지 10년이 된다. 10년이 되는데도 아직 30만원의 가슴앓이는 가슴 구석에 남아 때때로 도진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한 달 전쯤이다. 큰아이가 유학을 떠나게 되어 동네 중국집에 모시고 가서 탕수육을 시켜놓고 가족 송별회를 연 적이 있다. 그때 어머니가 탕수육을 오물오물 씹어 넘기는 것을 보고 조금 안심이 되어 그런 대로 얼마쯤은 더 버틸 수 있으리라 여겼던 것이다. 지금 돌이켜 생각할 때마다 빚이라도 내어 바로 해드렸어야 옳았을 것이라고 소용없는 후회를 되씹지만 예나 지금이나 월급쟁이 생활을 벗어나지 못하는 처지로서는 만 10년 전 그 돈이 그리 가벼운 액수는 아니었나 싶다.
이제야 내가 이따금씩 치통을 앓으면서, 그때 들뜬 틀니 때문에 제대로 식사를 못 하신 어머니를 생각하면 가슴 안쪽이 흥건히 젖어드는 걸 주체 못한다.
'그게 정말 수월찮은 액수였나'
"...........언젠가 비오는 날 어스름에 버스를 타고 지나다 보니 역촌동 네거리 약국 추녀 안에 자네 어머님이 혼자서 계시지 않겠나…, 그래 왜 아들네 집이 지척인데 안 가시고 저기서 비를 피하고 계시나 생각했었지…." 동생 친구가 아닌 내 친구가 이 한 마디를 무심코 내게 들려주었을 때 전기에 감전되듯 가슴이 뻐개지는 아픔을 느끼고 되돌아서 울고 말았다. 어머니는 아마 치통 때문에 내 집으로 오시다가 비를 만나 약국으로 피하셨으리라. 어느 아들네 집으로 갈까 망설이셨으리라. 아니면 돈 30만 원 이야기를 독촉하러 나섰다가 차마 발길이 안 떨어져 약국 추녀 밑에서 망설이셨으리라.
비 오는 날 저녁 어머니가 집에 오신 기억이 없다. 그러니 그냥 발길을 되돌리신 것이 확실하다. 크지도 아니한 키에 조심조심 내딛는 발걸음이 얼마나 무거웠으랴. 어느 날 아들이 '어머니 이것 가지고 치과에 가셔요.' 하고 돈뭉치를 내놓기만 기다리다, 끝내 그 소리를 못 듣고 가버리신 것이다. 어버이 살아실제… 라는 시조 한 수를 고등학교 은사 한 분이 써서 표구까지 해주신 적이 있다. 그걸 받아다 걸고서, ‘이게 왜 필요하랴.’ 하고 자만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어머니 10주기에 아직 가슴이 쓰린 것은 그 시조 한 수도 제대로 다 못 외웠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비 오는 날이면 나는 치통을 앓는다. 뒤늦게 깨닫는 늦동이의 불효에 대한 문제만이 아니다. 세상을 살아온 내 나름의 삶의 방식에 대해 새삼 어떤 회의가 깊어져 빗속에서 두리번거리듯 하는 것이다. 비 오는 날이면 쑤시는 어금니 턱에 왼쪽 손을 떠받치고, 어디 가까운 곳에 치과가 없는가 두리번거린다. 이런 꿈을 깨고 나면 내 나이를 짚어보게 된다. 비 오는 날이면 치통을 앓고 싶어진다.
* 시인 겸 아동문학가인 유경환 선생님은
2007년 6월 29일 작고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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