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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단 한 번 / 주인석

부흐고비 2019. 10. 17. 10:21

단 한 번 / 주인석

만남에도 기술이 필요하다. 요즘 들어 이 말에 부쩍 공감이 간다. 기술이란 만들거나 짓거나 하는 재주와 솜씨를 말하기도 하고 어떤 일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이나 능력을 말한다. 많든 적든 우리는 일상 속에서 수많은 사람과 만나게 된다. 예전에는 사람 만나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만남에도 기술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부터 만남을 중요하게 여겼다. 내게 만남의 기술을 가르쳐 준 세 사람이 있다.

첫 번째 기술을 가르쳐 준 사람은 산전할매다. 할매는 5학년짜리 손자 훈이와 4학년짜리 손녀 경이를 거두며 생활보호대상자로 살고 있다. 나와 산전할매의 만남은 몇 년 전의 일이다. 내가 자원봉사를 할 때,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쳐달라는 할매의 전화가 왔다.

훈이와 경이는 또래보다 몇 가지 미흡한 부분이 있긴 했지만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을 가진 아이들이었다. 내가 구구단 선창을 하면 훈이와 경이가 따라했다. 낱말 카드를 들고 알아맞히기 놀이를 했고 받아쓰기를 했다. 틀리지 않고 구구단을 모두 외우거나 받아쓰기 백점이 나오면 스티커를 붙여주면서 열 개 모이면 선물을 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덩치가 황소만한 훈이와 경이가 방바닥을 구르며 좋아했다.

6개월이 흘렀다. 공부가 끝나는 날, 할매는 밥을 먹고 가라며 안방으로 나를 떠밀었다. 이가 빠진 동그란 상에 알록달록 꽃이 피었다. 콩나물로 국만 끓여 먹던 나는 콩나물 요리가 그렇게 다양하다는 것을 할매가 차려주는 상을 받고 알았다. 콩나물 국, 콩나물 초무침, 콩나물 잡채, 콩나물 전까지. 나는 음식을 골고루 다 먹었다. 할매는 차린 것이 없어 미안하다고 몇 번을 말했다.

할매는 난전에서 콩나물을 팔았다. 그 콩나물로 만들 수 있는 요리는 다 만들었던 것이다. 할매에게 받은 콩나물 밥상이 세월이 한참 지난 지금까지도 내 가슴에 노랗고 통통하게 남아있다. 그것은 할매의 밥상 이후 그런 정성스런 밥상을 받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할매의 밥상은 일생에 단 한 번, 한 사람에게만 대접하듯 차린 것이었다. 그것은 할매만이 가지고 있는 인정을 바탕으로 한 만남의 기술이었다.

두 번째 기술을 가르쳐 준 사람은 모대학교 교수님이다. 내가 두 번째 작품집을 내면서 고견을 받을 때 일이다. 항상 바쁘신 분이라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의견을 주십사하고 부탁을 드렸다. 명쾌한 대답을 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반쯤은 포기한 상태였다. 명성이 자자한 분일수록 한 말씀 받기가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부탁은 드렸지만 마음속으로 ‘안 써주실 수도 있다’고 먼저 위안을 했다.

그런데 너무나 뜻밖이었다.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았는데 고견이 왔다. 교수님은 고견을 보내셨지만 내가 받은 것은 마음이었다. 새내기 작가에게 보내는 크나큰 격려였다. 그 격려에는 커다란 가르침이 있었다. 나에게도 누가 무언가를 부탁해 오거든 초심을 잃지 말고 마음으로 대하라는 가르침이었을 것이다. 교수님의 고견은 일생에 단 한 번, 한 사람을 위해서 쓰신 것처럼 정성을 보여주셨다. 그것은 교수님만이 가지고 있는 정성이 담긴 만남의 기술이었다.

세 번째 기술을 가르쳐 준 사람은 기도하는 남자였다. 내가 응급실에 실려가 죽을 고비를 넘겼을 때다. 어느 해, 설 다음 날이다. 몇 차례 아랫배에 진통이 오더니 갑자기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심한 고통이 왔고 쓰러졌다. 가까운 병원에 실려 갔을 때는 이미 때를 놓쳤다는 의사의 말을 들어야했다. 큰 병원으로 가기 위해 나는 응급 침대에 실려 나왔다. 그때 내 귀에 어렴풋이 이런 소리가 들렸다.

‘아이고, 안 되겠다.’

내 죽음을 미리 알려주기라도 하듯 병원 복도에 선 사람들이 나를 내려다보며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다른 병원으로 옮겨졌다. ‘한번 해 봅시다’는 의사 말의 기쁨도 잠시, 남자는 내가 죽어도 괜찮다는 서약을 해야 했다. 실험대 위에 잡혀온 개구리처럼 내 알몸엔 소독약이 발라졌다. 단단히 감은 내 눈에서 눈물이 새어나왔다.

그때, 내 얼굴 위로 뜨거운 물이 뚝뚝 떨어졌다. 남자는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하고 있었다. 남자와 꽤 긴 시간 동안 같이 살면서 남자의 그런 모습은 처음 보았다. 당당한 무신론자였던 남자가 신을 처음 만나는 장면을 차마 볼 수 없어서 눈을 꼭 감고 있었다. 그의 기도는 단 한 번, 신에게 매달리는 간절한 호소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남자만이 가지고 있는 절실함이 담긴 만남의 기술이었다.

일기일회라는 말이 있다. 누구를 만나든 평생 단 한 번의 만남처럼 생각하고 사람을 대함에 최선을 다하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그 말을 곱씹어 보니 부끄럽기 짝이 없다. 누구에게든 ‘단 한 번’의 마음으로 대했던 적이 있었던가. 그렇게 했더라면 언성을 높일 일도 불편할 일도 없었을 것이며 후회할 일은 더욱 없을 것이다.

만남에 대한 ‘단 한 번’의 기술은 좋은 인연을 만들 수 있는 지침이다. 행동할 수 있는 낱말 앞에 ‘단 한 번’이라는 말을 넣어 본다.

효도, 인사, 사랑,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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