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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기러기 / 김근혜

부흐고비 2019. 12. 3. 20:27

기러기 / 김근혜
동리목월 신인상


알에서 깨어난 기러기가 걸음마 중이다. 아직 세상 밖을 모르는 새끼 기러기들에게 무서운 것은 없다. 그저 잔잔한 수면 위는 평화롭기만 한 안식처이다. 떨어진 곡식을 먹으며 다른 서식지를 찾기 위해 길 떠날 채비를 하느라 분주한 기러기 떼가 내 아이 같다.

딸이 영국에 가서 공부한다고 했을 때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겨우 몇 마디 정도만 읊조리는 실력으로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어떻게 살아갈까 노심초사했다. 논스톱 비행기 표가 비싸서 다른 지점을 경유하는 비행기 표를 들고 혹시라도 잘못 타거나 안내인도 없이 무사히 학교까지 찾아갈 수 있을는지 모든 것이 걱정되었다. 무리 속에서도 맹금류에게 목숨을 잃게 되는 경우가 생기는데 보호권을 벗어난 아이라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전화가 걸려올 땐 반가움보다 나쁜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닐까 가슴이 철렁한 적이 많았다. 홈스테이 주인이 인종차별을 심하게 해서 피부색이 희멀건 유학생에겐 파티까지 열어주면서 자신에게는 냉동된 피자를 준다고 했다.

항변도 못하고 서러워서 울기도 했다는 말에 가슴이 미어졌다. 내가 영어를 잘했더라면 당장 전화를 해서 따졌을 것이다. 냉가슴 앓듯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라 가슴만 탔다. 전화까지 잘 터지지 않아서 연락이 끊겼을 때는 여러 가지 험한 생각으로 가슴이 조여들었다.

러시아에서 한국 유학생이 심한 인종차별로 폭행이나 살해를 당한 동영상이 스쳤다. 뉴스에서만 듣던 지구 밖에서의 일이 내 아이도 겪는 약소민의 서러움이었다. 포식자에게 물려가는 새끼를 바라보면서도 어찌할 수 없어 발만 동동 구르는 어미 새의 심정이 이러했을까.

나일론 신자에게 큰 변화가 생겼다. 편안할 때는 신을 찾지 않다가도 절박하면 찾게 되는 것처럼 새벽마다 자식을 위해 눈물의 기도를 드렸다. 아이는 신앙의 전부가 되었다. 멀리 떨어져 있으니까 비로소 어미가 된 기분이다. 겨우 걸음을 떼고 아장아장 내딛는 것 같아 불안하기만 한데 세상 밖으로 떠나보내서 편치가 않다.

아이는 날개를 펴려고 구르고 뒹굴고 나는 연습을 했다. 막상 서식지에 돌아와 보니 여러 종류의 새들이 먹이 다툼을 벌여서 들어갈 틈이 없다고 걱정이다. 이리저리 취업 원서는 내고 있지만, 바늘구멍보다 작은 문은 경쟁률이 높아 마음처럼 쉽지 않은가 보다.

아이는 지쳐서 실망감에 빠져 있다. 말도 함부로 붙일 수 없을 정도로 예민해져 있다. 어머니 아이나 취업 때문에 고삼 스트레스보다 마음이 더 무겁다. 말도 조심스럽다. 내 속도 딸아이만큼 편치는 않다. 아니 어미는 속이 더 많이 타도 내색도 함부로 하질 못한다. 이리저리 아이의 눈치까지 살피며 그날의 표정에 따라 내 표정도 관리해야 한다. 어쩌다 부모가 아이에게 비위를 맞추는 세상이 되었는지 한탄도 해본다. 어쩔 수 없는 현실이 혹독하기만 하다.

세상은 이들이 일등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나 잠재력을 인정하지 않는다. 오로지 일등만 받아들이는 블랙홀이다. 이등은 무능한 자일뿐이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 자격 조건이 되면 외모가 안 된다고 탈락시킨다. 취업하기 위해 성형외과에 줄을 선다. 호박에 줄을 그어서 수박을 만든다고 면접관의 눈에 다 찰리는 없다. 고운 체로 거르고 걸러서 티끌 하나 없어야 한다. 지구는 둥근데 세상은 각이 져 있다.

"엄마, 편안하게 죽는 방법이 없을까."

오죽하면 죽는다는 말이 나올까. 부모에게 업혀 살지 않을 거라고 여기저기 이력서를 내고 다닌다. 곪은 상처가 낫기도 전에 심장에 구멍 하나 더 뚫려 온다. 발버둥치는 딸애가 안쓰럽기 그지없다.

환경변화나 기상이변 등으로 기러기들의 서식지가 자꾸만 없어져서 정착할 곳이 없다. 생존을ㄴ 위한 몸부림으로 이리저리 떠돌아야 하는 성장통이 비단 철새들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먹을 것을 찾기 위해 떠돌이가 되어야만 하는 기러기들과 실업자로 전락할 내 아이가 다를 바가 무엇이랴. 어쩌면 철새로 사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할는지도 모르겠다.

친구는 남의 타는 속에 부채질을 하고 있다. 자기 아들은 대기업에 취업했다고 입이 마르도록 자랑이다. 순간 약이 바짝 오른다. 시샘이 나서 괜히 딸아이를 향해 화살을 돌린다. 친구 만나는 것이 무섭다. 귀마개가 필요하다. 세상이 우정의 빛깔까지 흐려 놓는다.

한 무리의 기러기 떼가 힘차게 창공을 난다. 갑자기 앞서 가던 기러기의 날갯짓이 힘겨워 보인다. 역기류를 감당하지 못해 자리이동을 하는 것이 눈에 띈다. 내 아이도 바람의 저항을 견디지 못해 잠깐 머물고 싶다고 아우성을 치는데 빨리 날아야 한다고 책망만 한 것 같다.

모난 세상의 틀에 갇혀 허우적거릴 때 기댈 곳은 어디인가. 우산의 역할을 해줘도 견딜까 말까 했을 아이에게 숨통만 조였던 것 같다. 어미의 마음보다 더 조급하고 고독한 싸움을 하고 있었을 마음의 무게도 모르고 대열 속으로 들어가라고 강요만 했다. 아이는 도전도 해보지 못하고 꿈을 접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절박함에 얼마나 암담했을까. 그래도 좌절하지 않고 꿋꿋하게 버티면서 안간힘을 썼을 아이를 생각하니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기러기는 같이 날던 동료가 낙오되면 다시 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합류한다고 하는데 나는 이런 미물만도 못한 건 아닌지 반성해 본다. 응원과 격려는 해주지 못하고 하마터면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 뻔했다. 역할도 못한 이름표뿐인 엄마는 아니었는지 새삼 돌아보게 된다. 아이의 동동거림 앞에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는 자신이 한없이 무력해진다.

이젠 거센 바람을 가를 수 있도록 기류에 양력을 만들어 주어 든든한 가족이 있다는 것을 믿고 의지하게 해 줄 것이다. 취업이 영원한 유예로 끝난다 할지라도 아이의 손을 끝까지 잡고 있을 것이다.

역풍이 일 때는 낮게 날아야 하는 것과 나는 속도가 느리다고 부끄러워할 일은 아니며 다른 사람의 걸음에 발맞출 필요가 없다고 말해줄 것이다. 어깨 짐이 무거워 날아오를 수가 없을 땐 좀 쉬어가도 괜찮다고 해야겠다. 인생은 단숨에 달려갈 수 있는 길이 아니라고.

새벽을 가르고 날고 있는 기러기 한 마리가 렌즈에 담긴다. 힘차게 날갯짓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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