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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벽 / 김근혜

부흐고비 2019. 12. 3. 20:28

벽 / 김근혜
제7회 중봉조헌문학상 우수상


장기읍성 둘레길이다. 자지막한 성벽은 여인의 허리선처럼 굽이굽이 감아 돌고 있다. 훤히 드러낸 등허리를 밟고 지인과 자분자분 걷는다.

한 층 한 층 쌓아올린 성벽은 각기 다른 얼굴로 정겹게 서 있다. 푸른 이끼 속에서 새싹은 움을 틔우려고 사르락 사르락 발길질을 한다. 발아래 엎드린 동해바다가 유난히 굼실거리며 금방이라도 달려올 기세다. 오밀조밀 모여 있는 낮은 집들이 어미 날개 아래 든 병아리 같다. 포근함이 밀려드는 오후다.

지나가는 여행객의 말소리가 외딴집의 담을 넘었는가 보다. 반가움에 뛰쳐나온 할머니가 여행객의 말을 받는다. 사람 구경하기가 얼마나 귀했으면 길손들의 발목을 잡을까.할머니의 풍기는 인상으로 봐서 젊은 날은 담벼락에 심어둔 매화만큼이나 고고했을 것 같다. 할머니가 들려주는 읍성에 얽힌 전설을 엉거주춤 담에 기대어 듣는다.

설국이라는 고려 여인이 있었다. 성벽 축조에 동원된 사랑하는 지아비를 만나기 위해 먼 길을 떠난다. 우여곡절 끝에 읍성을 찾아왔지만 힘든 노역으로 인해 지아비는 이미 죽고 없었다. 설국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눈물로 몇 년을 보내다 지아비의 무덤 위에서 죽고 만다. 한 맺힌 설국의 눈물이 비가 되었는지 스무 날은 퍼부었다고 한다. 할머니는 그 여인이 죽고 나서부터 노랑나비 한 마리가 읍성 주변을 가끔 맴돈다고 했다.

엄동설한에 무슨 사연일까. 때마침 노랑나비 한 마리가 나풀거리며 날아왔다. 서둘러 나비를 쫒았다. 한참을 가다보니 길이 끊어져 있었다. 길이 없는 길이었다. 설국이라는 여인이 창자를 끊어낸 흔적 같았다. 뒤를 돌아보았다. 막다른 길에서 한번쯤 돌아보게 하는 인연의 길 같다.

남편과 아홉 번 굽을 길을 지나면서 고개를 간신히 넘은 적이 있다. 애초에 곡절 없는 삶을 기대한 풋내기는 아니었다. 가슴의 나침반이 서로 반대로 도는 것이 문제였다. 일방통행이 더 위험하다는 걸 모르는 사람과 우왕좌왕, 좌충우돌한 삶이었다. 타인의 방식을 엿보면서 삶이 자라지만 그 사람의 공식엔 흉내내기가 없었다.

남편은 내 목소리를 감지하지 못했다. 목소리는 웅웅거리다 벽에 부딪혀 산하할 때가 더 많았다. 낮게 속삭일 때도 가파르게 치솟을 때도 있었지만 남편의 가슴에 닿기도 전에 통통거리며 튕겨져 나갔다. 늘 독백으로 끝이 났다. 독백은 또 다른 독백을 불렀고 벽을 통과하지 못한 목소리는 메아리처럼 되돌아왔다. 내가 내는 소리와 남편이 내는 소리는 늘 빗겨갔다. 그 사이 사이에서 많은 소리들이 만났지만 허공으로 사라졌다. 남편은 제 소리에만 오래 갇혀 있어서 남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가 되었는지 모른다.

남편을 용서하지 않으려고 벽이 되었다. 살아온 횟수의 절반을 사수해서 얻은 것은 분명 승리의 영광이어야 했다. 풀 죽어 있는 남편의 얼굴을 보며 기쁨의 축가를 불러야 했다. 패배자보다 더한 쓰림이 나를 옥죄는 것은 왜일까.

성벽을 두드려본다. 둥글고 넉넉한 소리가 난다. 세상을 품고 보듬은 소리다. 우리 부부가 내던 경박한 소리와 다르다. 서로의 목소리를 아끼고 사랑하며 배려한 순한 소리였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고요함이 정지된 시간 속에 머물고 있었다.

성벽은 견고해지기 위해 얼마나 많은 소리들을 마음으로 들으려고 귀를 다스렸을까. 흩어지는 소리들을 한 곳으로 모으기까지 시간은 끝없이 태어나고 죽었을 것이다. 새소리, 바람 소리, 달빛 스치는 소리에도 목청을 돋우고 서로 잘났다고 제 각각의 소리를 냈다면 울타리가 되진 못했을 것이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티격태격하며 우리를 앞질러 가던 남자와 여자에게 눈길이 머문다. 여자는 남자에게 못마땅한 것이 많은가보다. 날이 선 손톱을 세우고 있다. 배배 꼬여서 좀체 꺾이지 않는다. 남자는 그 심보를 꺾으려 안간힘을 쓰지만 끈질기다. 호락호락하지 않을 땐 맞받아치는 것보다 한 발 물러서 서 관조하는 것이 바람을 피하는 방법이리라. 남자는 급하게 해결하려들면 벽만 높아진다는 걸 깨달은 것일까. 몇 발자국 물러서서 숨을 고른다. 지인과 나는 앞서려다가 그들 부부를 지켜본다.

남자는 씽긋 웃으며 부드러운 눈길로 여자를 쳐다본다. 그 눈길이 내 맥박을 뛰게 한다. 남자와 여자는 티격태격 하면서도 서로의 호흡을 맞추려고 애쓰려는 모습이 역력하다.

'그래, 동행이란 저런 것일지도 몰라.'

튼튼한 성벽도 세월의 힘에 허물어지듯이 삐걱거리는 사람의 일이랴. 부부 간에서조차 내 목소리만 내려다보니 장벽이 되고 마는 건 아닐까. 흙으로 벽을 쌓을 때 볏짚이나 자갈을 적절히 섞어 넣어야 응집이 되는 것을 이제야 알 것 같다.

무조건 좋은 자재로 벽을 쌓는다고 견고하지는 않을 것이다. 볏짚이나 자갈이 균열을 막아주는 숨구멍 역할을 하듯이 사람 사는 일도 아옹다옹 얽히고설키면서 엉겨 붙는 것이리라. 서로의 장난을 반죽하면서 삶은 익어 가는지도 모른다.

길이 끊어진 자리에서 새로운 행로를 찾았다. 다른 길을 찾기까지는 여러 갈래의 길에서 헤맸지만 결국엔 출발점으로 귀결된다는 깨달음을 얻게 한 여행이었다. 살면서 맞닥뜨리게 되는 문제들을 다른 사람의 인생을 통해 살펴보게 된다. 가던 길 멈추고 자신을 돌아보기에는 굽은 길만 한 것이 없다. 우리네 인생길과 많이 닮았다. 읍성의 굽은 길도 그 중의 하나인 것 같아 내가 찾는 이유이다.

성에 와서 성을 쌓는 법을 배운다. 주어진 삶이 소중해진다. 삶의 각고가 누적된 후에야 행복을 알듯 우리는 선조들의 숨결에서 징비록을 얻는다. 역사의 흔적을 찾고 되새기는 이유이리라. 안온하고 평화로운 읍성이 오늘따라 든든해 보인다.

노랑나비도 왔던 길로 되돌아가는지 몸짓이 바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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