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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또 하나의 언어 / 김근혜
The 수필, 2019 빛나는 수필가 60인 선정작


징후다. 답답해서 밥이 목구멍에 걸린다. 산맥들이 꿈틀거리며 탈출을 꿈꾼다. 좋지 않은 호흡기 탓에 서랍 안에서 꿈이 늙을 때가 많다. 방랑벽이 있는 사람이 겨울을 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견디는 재간은 나이인 것 같다.

카메라 가방을 메고 무작정 시동을 건다. 이사 온 지 삼 개월이 지나가는데 낯설다. 감기로 인해 실내에서 지내다 보니 가을이 떠나고 없다. 직장을 그만둔 후론 사진을 찍는다. 영혼이 피사체에 빠져 일체가 될 때 느끼는 희열이 나를 바깥으로 밀친다.

누군가가 지나쳐버린 하루를 담고, 내가 사랑하는 파도도 넣으며 위안을 얻는다. 검은 상자 안에서 빨간 알약, 파란 펭귄, 다 닳은 지팡이가 나온다. 그들의 호흡이 멈추기 전에 재빨리 하드웨어에 저장한다.

사진은 자기변명이 없어서 싱겁다. 보이는 대로 말하고 전하는 정직함이 싫다. 민낯이 불편하다는 사람들은 세상 흐름에 맞게 부풀리고 화장을 한다. 사람 얼굴에도 여러 학문을 가미하듯 사진도 문학, 심리학, 고고학, 건축학 등, 이야기를 입힌다. 애써 뒤틀고 조미료를 넣어야 예술이 되는지 알 순 없지만, 의식적으로 의도한 사진도 맛이 있어서 빠지게 된다.

글자 없는 표정을 읽는다. 긴 휴식에 빠진 그들을 깨운다. 정지된 화면이 부스스 눈을 뜨며 말을 건다. 속살을 보는 순간이 즐겁다. 있음이 없음이고 없음이 있음이 되는 철학. 함축된 의미를 파악하고 매스를 든다.

그들의 생생한 삶의 현장을 내 삶과 환치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아픈 기억은 지우개로 지우고 바랜 부분은 빈티지 느낌을 살려 고풍스러운 맛을 준다. 노이즈가 난 부분은 더 거친 질감을 주고 팔, 다리를 자른다. 내 작품은 수술대 위에서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 고통을 감수한다.

상처 난 부분을 왜곡한다. 나를 비추는 거울이 분할되었다가 사라진다. 여러 사진이 합쳐져서 새로운 하나가 된다. 인연이 되어 새로운 누군가를 만나 가정을 이루기도 하고 헤어지기도 한다. 때론 근친상간도 서슴없다. 하나의 인격에 다중 인격을 부여해서 욕망의 화신을 만들기도 한다. 밋밋하던 가슴이 부풀어 오른다. 창조적 행위가 끝나고 소통이 이루어진다.

들어올리기조차 힘든 카메라의 무게가 그 순간만큼은 가벼워진다. 셔터를 너무 많이 눌러서 손가락이 쑤신다. 마약과도 같은 사진 작업이 통증을 잊게 한다. 내가 살아보지 못한 세상을 만들고, 가져보지 못한 것이 승화된다. 이런 순간이 좋아서 방랑벽을 핑계 삼아 쫓아다니는지 모른다. 상상 속에서만 존재할지라도 내가 꿈꾸는 것을 만날 수 있고 이룰 수 있으니 행복하지 않으랴.

민낯에 옷을 덧입히는 시각을 바꿔 놓은 것은 라오스 오지 마을 출사 여행이었다. 맑고 순한 눈을 가진 아이들을 본 후이다. 다섯 살 남짓 된 아이들이 축구를 하며 즐겁게 놀고 있었다. 바지가 벗겨지는 줄도 모르고 뛰노는 아이들의 풍경 속에서 문명은 이기였다. 내가 하는 사진 작업이 순순함에 대한 모욕인 것 같아 차마 광각렌즈를 바로 들이댈 수 없어서 망원렌즈로 그들을 담았다.

네 살배기 여자아이가 동생을 어르고 업고 있는 모습, 가장의 무게를 짊어지고 아무렇지 않은 듯 운명을 껴안고 살아가는 여성들. 불평조차 없어 보이는 평온한 얼굴에서 무엇이든 얻기 위해 발버둥치는 우리들의 모습이 대비된다. “인간은 구하다, 구하다 고苦의 세계에서 죽는다.”고 했던가. “크게 버리면 크게 얻는다.”는 진리를 그들에게서 깨닫는다. 많이 가지고도 결핍을 느끼는 혼탁한 가슴이 떨리고 있다.

문명을 받아들여야 하는 압박감이 없는 평화로운 곳에 대책 없이 불을 지필 이유는 없다. 신이 인간을 처음 만들었을 때, ‘보기에 좋았다.’고 말한 순전한 모습이 아닐까. 그날그날의 의식주를 해결하면 그게 행복인 것처럼 보였다. 꼬질꼬질하게 때가 묻은 옷을 입고 맨발로 다녀도 부족한 것이 없어 보였다.

사진은 또 하나의 언어이다. 세상에 때 묻지 않은 모습을 한 장이라도 더 담겠다는 작가들의 시선과 그들의 눈동자가 교차한다. 허리를 숙여야만 보이는 들꽃, 눈여겨보지 않으면 지나칠 수 있는 그들. 단지 삶의 형태와 태어난 나라가 다를 뿐. 우리와 똑같은 조물주의 선물이다.

빛을 받은 명부와 빛을 받지 못한 암부의 차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아니다. 누가 그들을 암부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빛이 강하면 그림자도 길 듯, 빛이 진정 빛이 아닐 수 있는 것을. 어느 생이 렘브란트광처럼 극적이고 입체적일 수 있을까. 빛이 약해 장노출을 통해 절대량을 확보할 때가 있는 것이 인생이거늘.

사탕을 내밀었다. 우르르 몰려오는 아이들의 눈이 맑다. 슬프다. “기브 미 어 초콜렛.”을 외치며 다니던 한국전쟁 후의 우리나라 현실이 광각으로 다가오다 망원으로 밀려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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