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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빈집 / 최윤정

부흐고비 2019. 10. 27. 19:06

빈집 / 최윤정


버림받은 지 오래인 듯하다. 그의 상처는 이제 아물기를 포기한 것처럼 보인다. 아픈 속살을 바람 앞에 다 내놓고서 신음조차 내지 않고 서 있다. 무덤덤해 보이기까지 하다. 그의 한쪽으로 기운 어깨에 앉아있던 새가 날아간다. 그와 나는 허공으로 천천히 그리고 우아하게 소멸하는 한 점의 새를 그저 무심히 바라볼 뿐이다.

먼지를 뒤집어 쓴 버스가 하루에 몇 차례 오갈 뿐인 시골길은 조용하다. 그 길을 따라 마을 깊숙이 들어가 본다. 버려진 집들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사람이 살지 않아 오랫동안 방치된 집은 떠돌이 짐승조차 쉬었다 가고 싶지 않을 만큼 을씨년스럽다. 세상 이치에 무관해 보이는 바람만이 폐가의 뼛속 깊은 곳까지 드나들고 있다.

마을 어귀부터 몇 채의 폐가를 지나쳤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는 이정표처럼 드문드문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잔해들은 꽁꽁 묶어 길목에 내놓은 쓰레기봉투처럼 어떤 삶의 폐기물일 뿐 별 감흥을 주지 못했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의 집들과 조금 거리를 두고 산 아래 조붓이 앉아 있는 한 집을 보기 전까지 말이다.

허물어진 담장 너머로 작은 마당과 개집이 보인다. 털이 복슬복슬한 강아지를 키우던, 이 집에 온기를 피워 올리던 한 가정을 그려본다. 가난하지만 매일 저녁 가족이 함께 할 수 있는 밥상에 감사하던, 서로를 위해 마지막 남은 한 점의 고기에 무관심한 척하던 그들. 방안에서 새어나오는 조잘거림에 걱정 없이 졸고 있는 섬돌위의 강아지. 해는 기울고, 작은 집을 이불처럼 덮어주는 포근한 산 그림자는 소리 없이 어두워졌을 것이다. 소박한 행복을 꿈꾸던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상처받은 이의 가슴처럼 버려진 집 한쪽 천장이 뻥 뚫려 있다. 누구에게 저 속내를 헤쳐보인 것일까? 구멍 난 천장으로 보이는 하늘에 별이 가득하다. 저 별조차도 몇 백만 년 전의 한 행성이 버리고 간 흔적에 불과하다. 결국, 버려진 집은 풍장 되어 사라질 때까지 고립의 한가운데서 외로움에 떨어야 한다.

문짝과 쇠붙이가 붙어 있었을만한 것은 누군가 이미 떼어간 후다. 아무에게도 필요 없을 것드만 남아 한 때 사람의 손길이 닿았던 과거를 떠올리고 있다. 온기가 닿았다 버려진 것들은 모두 애잔하다. 흙먼지를 고스란히 뒤집어쓰고 있는 낡은 신발은 아직도 주인을 기다리는 듯하다. 밑이 뚫린 대야는 한 때 자기가 품었던 것들을 차례로 떠올려 보는 중인지도 모른다. 남겨진 물건들은 저마다 슬픈 표정을 지니고 있다.

허물어진 담장과 빈 창고, 부산한 손길이 떠난 부엌, 문짝과 천장이 뜯겨나가 이제 아무것도 따뜻하게 품을 수 없는 방. 지독한 적막이 불러오는 환경처럼 철저히 버림받은 것에 찾아오는 지난날의 기억은 악몽보다 아프다.

지붕의 양쪽이 내려 앉아 빈집은 더 의기소침해 보인다. 양 눈썹이 처진 슬픈 얼굴 같아 보이기도 한다. 한 때는 아버지의 망치질 소리가, 어머니의 싫지 않은 잔소리가, 아이의 소란스러움이 가득했던 때가 있었다고 말하는 것 같다. 가만히 귀 기울여 봐도 들리는 것은 바람 소리와 바람에 부딪히는 나뭇가지 소리뿐이지만 다만 짐작하는 것이다. 말 못하는 이의 입처럼 뻥 뚫린 창문마다 품고 있는 이야기들을.

가구 수가 그리 많지 않아 보이는 작은 마을에 버려진 집이 꽤 보인다. 목가적 시골 마을은 이제 그림 속에서나 만날 수 있는 것인가. 문득 고즈넉한 마을을 감싸고 있는 고요가 시골 풍경의 서정만은 아닌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 이곳을 찾기 전 마음속으로 편안한 휴식과 어머니의 포근한 품을 떠올린 것이 죄스럽다. 나약해진 나를 잠시 기대고 위안을 얻으려 했던 어리석음이 밤공기 속으로 흩어진다.

상처를 아물게 하는 것은 위로가 아니라 시간이라고 의연하게 서 있는 빈집 한 채가 말을 걸어온다. 그 시간을 꿋꿋하게 견디는 것만이 그와 내게 남은 것일까. 사방은 고요하고 깜깜하다. 벼랑도 굴곡도 없는 하늘엔 별들이 반짝이고 있다.

외진 곳에 홀로 서 있는 버려진 집들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가슴 안쪽이 저릿해 온다. 버려진 집은 홀로 자신을 지워야만 하는 가혹한 형벌을 받은 죄인 같다. 바람과 비에 이미 절반쯤 지워져 버린 빈집이 나를 바라본다. 그의 눈썹이 조금 더 아래로 처지는 것 같다. 그 눈썹 뒤로 다시 새 한마리가 날아오른다. 둥지를 틀지 못하고 멀리 사라져 가는, 잠시 우리에게 머물렀던 사랑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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