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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씨오쟁이 / 박경혜

부흐고비 2019. 10. 27. 14:20

씨오쟁이 / 박경혜
제27회 신라문학 대상


삼십여 년 만의 고향길이다. 도시를 벗어나 겨우 십여 분 달려왔을 뿐인데 풍경이며 공기가 완연히 다르다. 모처럼의 나들이에 숨통이 확 트인다며 기꺼워하시던 어머니는 창밖에 시선을 두고 언제부터인가 말이 없다. 생각이 많아 보이는 어머니의 침묵에 차안의 공기도 덩달아 무거워진다.

회오리바람 한 줄기가 언 들판을 핥고 지나간다. 부지런한 농부는 벌써 거름을 내었는지 군데군데 들 빛이 거뭇하다. 눈앞이 아롱거린다. 땅김이 겨우내 얼고 튼 살갗을 추슬러 햇살 속으로 아지랑이를 피워 올리는 중인가보다. 아마도 얼어붙었던 마음을 열고, 다사로운 기운으로 몸을 녹여 새 생명을 키워내기 위한 준비를 하는 것이리라.

부모님은 자식들 뒷바라지를 위해 고향을 떠났다. 허나 도시생활은 어수룩한 시골 사람들에게 그다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몇 년 만에 고향동네의 반이 넘던 전답을 야금야금 팔아먹고 집 한 채만 겨우 건졌다. 물론 어머니의 잘못만은 아니었다. 자식들 공부바라지로 팔아먹은 것보다 마음만 태평양 같아 무턱대고 사람을 믿고 보는 아버지의 보증 빚으로 넘어간 전답이 더 많았다. ​그때부터 조상님 뵐 면목이 없다며 어머니는 고향에 발길을 끊었다. 고향은 그 곳을 떠난 사람들이 힘겨운 삶에 치여 허덕일 때 마음의 뿌리를 내릴 수 있는 보류의 땅이다. 그것을 잃어버린 삶이란 비빌 언덕을 빼앗기고 떠도는 부초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으리라.

​ 아버지의 연이은 사업 실패로 시어머니와 다섯이나 되는 자식들을 건사하는 일은 늘 버거웠다.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다리가 휘청 꺾이는 날인들 왜 없었으랴. 허나 어머니는 한숨한번 크게 내쉬지 않고 힘에 부치는 순간마다 이를 악물었다. 밖으로 뱉어내지 못한 한숨은 아마도 속으로 고여 들어 피멍울이 생기고, 오장육부를 병들게 했으리라. 살림살이가 오그라들수록 오대독자인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애정은 더 유난해졌다. 딸들에게 살가운 아버지와는 대조적으로 당신의 모든 일상은 늘 아들의 축으로 공전하고 있었다.

마을에는 인기척이 없다. 아직은 코끝이 매운 겨울의 끝자락이어서인지 집집마다 문이 굳게 닫혀있다. 고개를 푹 숙이고 걸음을 재촉하는 어머니를 보며 아무와도 마주치지 않은 게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다. 삽작에 서서 어머니는 잠시 숨을 고른다. 집에는 대문이 없다. 언제든 길손이 들러 목을 축일 수 있도록 담장을 낮추고 대문을 달지 말라고 하신 할아버지의 유지에 따라 마당은 바로 골목길로 이어지고 있다. 서너 발자국이면 닿을 삽작과 마당 사이. 어쩌면 삼십년의 세월이 마음의 거리를 만들어 어머니는 선뜻 발을 들여 놓기가 쉽지 않은지도 모를 일이다.

집은 의외로 정갈하다. 마당에는 비질한 흔적이 곱게 새겨져 있다. 집을 관리해주는 먼 친척 아저씨의 바지런함 덕이리라. 발소리를 죽여 집안을 둘러보는 어머니의 발끝을 눈으로 쫓는다. 당신의 손길이 수천 번도 더 거쳐 갔던 장독대며 정성들여 사시사철 꽃을 피워내던 수돗가, 그리고 잠실과 일 년치의 양식을 갈무리해두던 두지를 더듬다가 시선이 벽에 머문다. 앙증맞은 망태기가 조롱조롱​ 걸려 있다. 내려서 열어보니 마른 옥수수며 팥 등 곡식들이 조금씩 들어 있다. 세월이 얼마나 지났는데 기특하게 아직도 이리 멀쩡하냐고 탄성을 지르는 나를 보며 어머니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으신다. 그때서야 그 씨오쟁이의 비밀은 아저씨의 세삼한 배려라는 것을 알아챘다. 다시 보니 모두가 탱글탱글한 알곡이다. 하이고, 실하기도 하다. 속엣 말을 하며 어머니의 입이 귀에 걸리도록 얼굴이 환해지는 것을 보니 그것을 뿌릴 땅은 없지만 내심 고맙고 기꺼운 눈치다.

집은 고운 먼지에 덮여 은밀한 느낌이 든다. 바람 많은 날씨 탓이리라. 대청마루의 먼지를 손바닥으로 쓱쓱 훔친 어머니가 걸터앉는다. 발치의 뜰 위로 햇살이 허벅지게 쏟아져 내린다. 세월의 무게는 어머니뿐 아니라 집도 부피를 작게 만들었나 보다. 오형제와 닭과 강아지가 어우러져 종일 뛰어 놀아도 넓기만 하던 대청마루와 마당이 한 뼘에 잡힐 듯 자그마하다. 내가 나란히 걸터앉기를 기다렸다는 듯 어머니는 조심스럽게 꽁꽁 감추어 두었던 씨오쟁이를 슬그머니 꺼낸다.

​ 스무 살에 시집을 와서 강보에 쌓인 아이를 연이어 잃었다. 어렵게 딸 하나를 키워냈지만 그 후로 오년이 넘게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할머니의 성화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손 귀한 집에 대가 끊기게 생겼으니 씨앗을 들여야 한다고 소리를 높였다. 단호하게 반대를 하시던 할아버지마저 슬그머니 뒤로 물러앉으시는 눈치였다. 마음 여린 아버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안절부절못하시더니 종내는 종중 일이라거나 혹은 다른 핑계를 만들어 출타하는 일이 잦아졌다. 어머니는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짙은 암흑에 갇혀 숨이 막혔다. 칠흑 같은 어둠, 방향도 가늠할 수 없는 곳에서 화살처럼 날아오는 할머니의 모진 말들은 뼛속깊이 박혀 아물지 못할 생채기를 만들었다. 대를 잇지 못한 죄인이 되었으니, 시집살이는 살이 얼어터지는 혹독한 겨울을 홑옷으로 나는 것보다 더 시렸지만 신음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아궁이에 불을 넣을 때가 울 핑계로는 가장 좋았다. 빨갛게 부어오른 눈은 청솔가지 연기 때문이라며 스스로 마음 단도리를 단단히 하곤 했다.

급기야 할머니는 대처에 새살림을 내어 손자를 보겠다고 나섰다. 할아버지는 헛기침만 자꾸 하시며 어머니의 속을 태웠다. 몇 번이나 대처에 다녀오신 할머니가 집을 사야겠노라고 할아버지께 논을 팔아 돈을 마련해 달라고 성화를 하시던 즈음 어머니가 입덧을 했다. 눈물마를 날 없는 새댁이 안쓰러워 조상님이 주신 선물이었을까. 시집에서 쫓겨날지도 모를 삶의 벼랑 끝에 섰을 때 구세주처럼 아들이 태어났다. 그 날이 마침 고조부의 제삿날 인지라 친지들이 모인 자리에서 할아버지는 한 시간이 넘도록 제사상 앞에 엎드려 일어날 줄을 몰랐다. 더 할 수 없이 기꺼운 마음에 며느리에 대한 미안함이 더해졌음이리라. 어머니는 고운 씨오쟁이에 뜨거운 눈물과 함께 당신의 생명을 이어준 알곡을 넣고 마음 깊이 감추었다. "니 오빠 덕에 내가 이 집에서 살아남은 기라." 말끝에 물기가 촉촉히 배어난다.

처음 들여다보는 어머니의 씨오쟁이는 핏빛이다. 아들이 뭐라고 싶지만, 대 잇기를 중시하던 그 시대에는 귀하디귀한 존재가 아닐 수 없었으리라. 오빠에게만 유난한 사랑을 퍼붓던 어머니가 야속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허나 씨오쟁이에 감추어진 생채기를 보고나니 슬그머니 내가 아들이 아닌 것이 도리어 죄스러워져서 마주잡은 손에 땀이 배어난다.

말로 낸 생채기는 세월이 흘러도 쉽사리 아물지 못하고 자주 덧나는 법이다. 산산이 부서진 젊은 어머니의 마음을 퍼즐처럼 아무리 끼워 맞춰 보아도 떨어져 나간 조각들 때문에 아귀가 잘 맞지 않는다. 제대로 봉합하지 않고 대충 얼버무려 둔 상처가 흉한 자국으로 흔적을 남겼다.

마음에 고인 물기를 훔쳐내며 어머니의 휴대전화기 단축번호 일번을 꾹 누른다. 무뚝뚝한 신호음이 몇 번 건너가더니 응석 섞인 오빠의 목소리가 건너온다. 얼른 어머니의 귀에 갖다 대주는데 간질간질한 단어들이 통통 튀어 오른다. 만면에 웃음을 가득 담는 어머니, 씨오쟁이 속 알곡하나가 당신의 마음에 싹을 틔우는 중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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