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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등대 / 박경혜
제1회 등대문학상 입상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는 누구나 두려움을 느끼기 마련이다.
바다는 검게 잠겨있다. 초저녁부터 석양빛을 온몸으로 빨아들여 붉게 타들어 가더니 한순간에 소진되어 버렸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불규칙 음으로 소리만 들린다. 철썩 처얼~썩 쏴~!
미명이 트기도 전 새벽을 열며 조업을 나간 배 중 대부분은 어둠이 내리기 전에 귀항 했지만, 한 척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항구는 불안한 마음들로 두 손 마주 잡은 간절한 기도만 파도에 씻기고 있다. 기다리는 가족들의 애타는 마음은 이미 수평선 너머까지 마중 나간 지 오래다. 망망대해에서 혹시라도 뱃길을 잃지는 않았을까 불안한 마음으로 가장을 기다리는 그들이 의지할 것이라고는 오직 등대불빛뿐이다.
등대는 바다가 짙은 어둠에 잠길수록 더 환하게 불을 밝히고 밤새 깜빡이며 레이저 같은 빛을 쏟아낸다. 누구든 길을 잃었거든 여기를 보라. 헤매며 두려움에 떨지 말고 나를 믿고 길을 잡으라. 어쩌면 등대는 밤바다를 가르고 다녀야 하는 뱃사람들의 종교이며 신이자 그들의 종착역이고 사랑하는 가족들의 품이기도 하리라.
아버지는 등대다.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날부터 대학 졸업까지 칠 년을 하루같이 아버지는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리셨다. 밤 열 시만 되면 등댓불을 켜고, 전쟁터처럼 치열하게 경쟁하는 콩나물 교실에서 지쳐 돌아올 딸을 따뜻이 맞을 준비를 하고 계시는 것이다. 대학생이 되어 귀가 시간이 들쑥날쑥한데도 그 시간만 되면 나가서 기다리곤 하셨다. 늦은 시간에 집에 돌아온 날은 자리를 옮겨 앉은 등대를 찾아 내가 버스 정류장으로 가야 했다.
귀항이 늦어졌던 배가 돌아왔다. 항구는 기쁨의 열기로 끓어오른다. 환호성에 이어 볼멘 원망의 소리가 파도에 부서지고 묻힌다. 지각으로 돌아온 어부들과 그의 가족들도 수확물과 어구들을 챙겨 두런두런 낮은 소리를 남기며 어둠에 묻혔다. 무인등대만 덩그러니 항구에 남겨두고. 바다는 다시 고요하다. 고기잡이 나갔던 마을 어부들이 모두 무사귀환 한 것을 목격해서인지 마음이 한없이 평화롭다. 바위에 부딪혔다 밀려나는 파도 소리는 여전한데도 고요하게만 느껴지는 것은 기분 탓인지도 모르겠다.
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 ‘일 포스티노’가 문득 생각나는 것은 넓은 모래사장과 푸르게 맑은 바닷물이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핍박의 역사 속에서 그는 칠레 국민의 정신적 등대가 되어주었지만, 군사정권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그 등댓불이 꺼지던 날 칠레인들은 좌표를 잃고 파도에 휩쓸리며 표류를 했다. 그의 아름다운 시어들이 파도소리에 섞여 마음을 적신다.
어촌이 불빛 한 점 없이 고요한 어둠에 잠겼는데도 등대는 여전히 빛을 반짝이고 있다. 결혼하고 나서도 마음이 지치거나 남편과 갈등이 생기면 나는 등대를 찾아가곤 한다. 아직은 파랗게 날 선 신경들을 어찌하지 못하고 스스로 베여 생채기가 나고 쓰라릴 때마다 돌아보면 여전히 나의 등대는 그 자리에서 환한 빛을 뿜어내고 있다. 너의 마음이 상처받고 지치면 나를 보아라. 여전히 나는 너를 위해 불을 밝히고 있노라. 아버지는 그렇게 스스로 등대가 되어 자식들의 마음이 돌아갈 곳을 마련해주곤 하신다.
당신의 서재는 내게 가장 편안한 안식처다. 알지 못할 수많은 한자와 빽빽하게 꽂힌 오래된 책의 냄새, 그 위에 내려앉은 약간의 먼지들조차 마음을 평화롭게 한다. 그곳에 들어서면 나는 철없는 아이가 되어 한껏 어리광을 부리고 마음을 무장해제 한다. 어느 순간 생채기가 아물고 마음이 평화로워지면 나의 등대에도 아침이 찾아온다. 등대의 휴식은 아침부터 시작된다.
창을 열어놓고 파도 소리에 마음을 맡기고 있다가 잠이 들었던가 보다. 어둠 속에서 바다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비릿한 살 내음이 생동감을 느끼게 한다. 아직은 슬슬 기지개를 켜고 있지만 환한 아침이 되면 은빛 비늘을 반짝이며 용트림을 시작할 것이다. 등대를 본다. 빛이 희미해져 잘 보이지 않는다. 밤새 혼신의 힘으로 타오르며 바다의 나그네들을 지키느라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이제 휴식의 시간이다. 등대는 해가 빛나는 동안 깊은 잠에 빠지리라.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것은 변하기 마련이다. 등대도 변신을 시작했다. 우리나라의 바닷가에는 등대지기가 상주하는 등대와 무인 등대를 합해 모두 4,476기의 등대가 설치돼 있다고 한다. 단순히 바다의 나침반 역할만 하던 것이 해양 체험 공간, 이벤트 행사장, 공원, 박물관 등 다양한 모습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등대는 밤바다뿐만 아니라 낮의 바다까지 책임져야 하는 무거운 임무를 수행 중이다. 화려한 변신을 거듭하고 있는 등대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나의 등대가 빛을 잃어가고 있다. 고혈압으로 쓰러지신 후부터 마음도 몸도 흔들리는 날이 많다. 이제 더는 자식들을 위해 밝은 빛을 밝혀주지 못하고 자주 앓아눕는다. 불을 켤 시간을 자주 놓치니 잊혀져가는 무인등대처럼 찾아오는 발길도 뜸하다. 관심을 받지 못하는 등대는 비바람에 몸이 상하고 외로움에 마음이 상하는 법이다.
과거는 역사책 속에 갇힌 이야기 같은 것이다. 손주들이 인정해주지 않는 아버지의 지난 시간도 그러하다. 사진 속 당당한 당신의 모습은 그대로 액자에 갇혀버렸다. 나의 등대가 세월의 풍파에 칠이 벗겨져 흉물스러워진 채로 둘 수는 없는 일이다. 하여, 한여름 녹음처럼 푸르던 아버지의 시간을 정리해 문집을 만드는 작업을 시작했다. 등대의 화려한 변신은 철없는 손주들에게도 좋은 박물관이 될 터이다.
창으로 스며드는 햇살에 놀라 흩어졌다가 굽은 어깨에 내려앉는 먼지의 무게조차 버거워 보이는 나의 오래된 등대가 문득 그리운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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