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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끝 / 박시윤

부흐고비 2019. 10. 28. 10:24

끝 / 박시윤
제3회 목포문학상


땅 끝에 와 있다. 물결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바다 앞에 아이를 안고 섰다. 바알갛게 부서져 내리는 노을이 아이와 나의 얼굴을 물들이고 있다. 해는 수평선 끝에서야 비로소 마지막 한계를 불살라놓고 유유히 사라진다. 묽은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다. 멀리 보이는 건물과 산들이 엷은 실루엣을 드러내고, 틈틈이 비워진 공간마다 어둠을 채워나간다. 해넘이가 끝난 사방천지는 어둡고 싸늘하다. 끝을 본 전쟁터의 뒷날처럼 숨죽인 채 어떤 소리도 새어나오지 않는다. 절대로 굴복하지 않는 자연의 섭리속에 파도 소리만이 가슴으로 자작이 흘러든다. 모래밭에 다다라서야 조각조각 깨어져 생을 마감하는 파도의 눈물은 가슴으로 쓰디쓴 눈물을 삼켜보지 않는 이는 알지 못하리라.

아이를 품에 꼬옥 안고 바람을 맞는다. 뜻하지 않게 내 몸의 마지막이 된 아이다. 한가위를 보내고도 빛을 쉬이 누그러뜨리지 못하는 달 아래 한참이나 서성인다. 밤바람이 제법 쌀쌀하지만 아이도, 나도 이 서성임을 끝낼 생각은 없다. 일 년 전 작은아이를 출산하고 산 정상을 정복한 것처럼 기뻤다. 세상 어떤 행복에도 견주지 못할 만큼 벅찬 행복이었다. 아이를 보며 간간이 느껴지는 차가운 기운이 몸의 일부를 만지고 갔는지도 모를 만큼 바쁘게 살았다. 그러나 기쁨은 잠시, 몸살처럼 내 몸에 적신호가 들어왔다. 병病이 자리잡은 몸은 차가웠다. 도려낸 살점의 몇 곱절을 항생제로 채워야 했다. 수술 전날은 뜬눈으로 새웠다. 어쩌면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오늘이 인생의 끝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수없는 생각들을 지면 위에 흩어 놓아야만 했다. 사랑하는 아이들이게, 남편에게, 부모님께, 형제자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있었다. '끝으로 만약에 수술이 잘못되어 내가 돌아오지 못한다면 …….'

다 벗은 몸 위로 차가운 모포 한 장이 덮였다. 누군가의 노련한 손놀림에 의해 자유롭던 사지가 묶였다. 몸을 에워싼 사람들이 족히 열은 넘는 것 같았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체취와 얕은 숨소리마저도 포말처럼 낱낱이 일어나 말초신경을 두드리고 있었다.

문이 열리고 누군가의 발소리가 크게 들렸다. 스크린에 가려져 볼 수는 없었지만 그가 나의 몸 일부를 도려낼 집도의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이마 위에 커다란 라이트가 강렬하게 켜졌다. 순간 눈을 감았다. 망막을 찌르는 빛의 자극에 혼란이 일었다. 몽환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방금 문 밖에서 배웅해 주던 남편과 돌배기 아들의 기억은 아득히 먼 곳으로 떠밀려가고 있었다. 어디론가 이끌려 가면서도 길은 보이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요란한 빛들이 질서정연하게 내려앉았다. 정신을 가다듬고 눈을 떴다. 바다였다. 정제되지 않고 떨어지는 태양은 비수처럼 몸 곳곳에 들어와 박혔다. 뜨거운 태양 아래 모래알들은 쉼없는 노래를 만들고 있었다. 쏴아- 쓰으-. 나는 여태껏 바다에 오면 모래성을 쌓거나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흔한 낙서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토닥토닥 조심스레 다독이며 주인 없는 무덤만 만들었을 뿐이었다. 홀로 서 있는 바다는 너무도 평온했다. 바다를 앞에 두고서도 쉽게 잊지 못하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 나는 왜 이토록 집착을 하며 더듬고 있는 것인지, 두고 온 미련이 없다고 한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손이 저렸다.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바늘 같은 차가운 통증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정신이 혼미했지만 본능처럼 감지되는 또렷한 기억들은 생의 마지막까지도 쉬이 잊지 못할 것이다. 사람이 살다 떠난 작은 섬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타 들어가는 살점의 냄새며 삶의 무게만큼 고단하게 했던 병들이 반란을 일으켰던 것처럼 의사는 뜨겁게 손끝으로 병을 도려내고 있었다. '톡' 무언가가 분리되는 느낌이 너무도 또렷이 기억의 한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다행히 나는 살아 있었다. 살고자 목숨을 구걸한 대가로 다시는 잉태를 할 수 없는 형틀을 떠안아야 했다. 여자임에도 여자일 수 없는 나의 섬은 구실을 잃었다. 눈물은 쉼 없이 밀려드는 파도처럼 끝을 몰랐다. 도려낸 상처는 아물면 그만이라 해도 끝을 경험한 마음은 쉬이 아물지 못할 것이다. 몸이 회복될 무렵 남편이 가족여행을 권했다. 그리고는 이 땅이 끝나는 곳 남해로 나를 데려왔다.

까마득히 멀리 있는 것처럼 끝이 보이지 않았다. 허름한 민박집 마당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끝이 없었다. 하늘과 맞닿은 수평선이,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바다인지 구분조차 어렵게 했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그들의 속삭임이 밀려왔다 밀려 나간다. 과연 바다의 가슴에도, 바다의 속삭임에도 끝이 있는 것일까. 이미 끝나버린 내 몸의 섬 하나가 문득 그리워졌다.

남편의 여린 낚싯대 끝에 제법 큰 물고기 한 마리가 올라왔다. 바람이 거센 방파제의 하룻밤을 꼬박 기댄 남편이었다. 몸이 약한 나를 위해 싱싱한 옥돔 한 마리 건져 올려 약으로 쓰겠다며 밤이 새도록 얼마나 많은 공을 들인 사람인가. 허탕만 치더니 밤의 끝에서 맛보는 짜릿한 손맛이란다. 한 자에 가까운 물고기가 뜰채에 담겨 오면서도 끝까지 제 힘을 놓지 않고 몸부림을 친다. 방파제 끝에서 잰 걸음으로 오는 남편의 손에 제법 크게 요동을 치는 물고기 한 마리가 들려 있었다. 새벽이 오려는지 어렴풋이 남편의 웃음이 보였다.

제법 날카롭고 예리한 지느러미며 붉은 아가미 그리고 무엇보다 너무도 맑은 눈에 얼어붙은 나는 아무런 기쁨도 표현할 수가 없었다. 뻐끔거리는 아가미가 내 눈 끝에서, 심장 끝에서 힘차게 쿵쾅이고 있었다. 감정의 혼란을 일으키듯 내 몸은 경련하며 떨고 있었다. "그냥 놓아주지 그래요." 그 한마디에 남편은 두말없이 물고기를 바다에 방생하고는 살며시 웃었다. 수술대 위에서 어렴풋이 떠올랐던 나의 한 자락 공포처럼 물고기도 순간의 끝을 보았던 걸까.

늘 위태로운 모습으로 끝에 서 있던 나였다. 그 끝이 두려워 매번 호흡을 가다듬으면서도 어쩌면 그 끝을 즐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중환자실 간호사로 근무하며 얼마나 많은 환자들의 끝을 보아왔던 나였던가. 끝이 날 무렵이면 긴 호흡을 유도하며 편안하고 안락한 길을 열어주려 얼마나 노력했었던가. 그러면서도 정작 나 자신에게는 얼마나 냉정하게 외쳐댔던가. 죽음은 단순히 생을 마감하는 순간의 의식일 뿐이라고.

나는 늘 끝을 보고 싶어 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면 습관처럼 먼저 끝부터 떠올렸다. 일을 할 때도 한 가지 일에 몰두하며 끝을 보고서야 다른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일은 쉽게 포기하거나 아예 시작도 하지 않았다. 끝이 두려워 여러 날을 하얗게 지새우거나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술을 마시기도 했다. 나는 이토록 끝을 두려워하면서도 끝을 향해 집착하며 달렸다.

밤의 끝에 새벽이 시작되고 모래밭에 다다른 파도는 다시 일어나 밀려온다. 수평선 끝으로 어제 진 해가 떠오른다. 저마다의 사연들이 내려앉은 풀끝에 이슬이 맺혀 있다. 이슬은 햇살을 머금고 반짝이며 바닥으로 떨어져 몸을 숨긴다. 시작과 끝은 함께 한다고 했던가. 끝은 저마다의 시작과 의미를 담고 고귀하게 지어지는 매듭이었으며 새로운 것으로의 시작이었다.

해가 솟아오르고 있다. 어둡고 차갑던 바다의 물결 위로 은빛 햇살이 바스락히 내려앉고 있다. 잠들었던 아이가 깨어 반짝이는 눈 속으로 가득히 햇살을 주워 담고 있다. 오랜 산고의 끝에 경이로운 출산이 시작되고, 탯줄의 끝에 잉태되어 있던 질기고도 질긴 생명의 결정체 아니던가. 산고의 끝과 아이의 첫울음과 동시에 나는 어머니로서 질곡의 삶을 열었던 것처럼 시작과 끝은 늘 함께 있었던 것이다.

모든 것은 끝을 가지고 있다. 보이든 보이지 않든 한계에 다다랐을 때 끝을 보고자 우리는 얼마나 많은 길을 돌고 돌아가는지 모른다. 처음부터 끝을 염두에 두고 시작한다며 궁상맞은 끝은 시작도 없을 것이다. 나는 여태껏 너무나 많은 끝을 보아왔으며, 스스로 또 얼마나 많은 끝을 만들어 왔는지 모른다. 잘된 것이든 못된 것이든 끝은 저마다의 시작과 흐름을 열정을 담고 고귀하게 매듭을 지어 간다는 것을 서른넷의 끝에 와서야 깨닫게 되었다.

수평선 끝에서 하루가 시작되고 있다. 구실을 잃고 버려진 작은 섬에 다시 고귀한 잉태를 꿈꿔 본다. 무인도에도 꽃은 핀다는 말을 믿고 싶다. 짠 바닷바람과 갈매기가 날라다 준 뭍의 냄새를 맡으며 나만의 색깔로 꽃을 피우고 싶다. 끝은 끝을 맺는 순간 또 다른 시작을 준비한다는 것을 이제야 본다.

나는 죽지 않고 살아있다.

숱하게 맺은 끝과 더불어 숱하게 많은 시작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그래, 다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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