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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엮어 길을 내다 / 박필우
제6회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대상
호방하면서 신비함이 가득한, 거칠면서 보석 같은 의미가 담긴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이 바로 영덕 '블루로드'입니다. 길 앞에 서면 유랑의 본능이 살아난다고 합니다. 유랑민은 자연을 숙명으로 여기며 떠다녔을 것이지만, 나는 숙명의 절박함이 아니라 생활의 활력을 위해 길을 걷습니다. 잠시 자발적 유랑민이 되어 마주하는 길, 자연과 삶을 아우르는 뫼비우스의 띠가 되어 걸어갑니다.
한 귀퉁이 슬쩍 돌아가면 마법처럼 새로운 세상이 펼쳐집니다. 지치지 않고 밀려오는 파도를 바라보며 사춘기적 용기를 떠올리다가 오랜 시간 파편처럼 떠돌다 문득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졌던 순수한 시절의 꿈이 되살아나곤 합니다. 한적하고 촉촉한 외줄기 길을 따라가면 문득 먼 데 파란 하늘과 사파이어빛 바다가 눈을 밝혀 무던하던 가슴을 설레게도 합니다. 자연, 무질서 속의 질서, 진정 자유란 이러이러하다며 이야기하는 듯합니다.
블루로드의 첫걸음 '쪽빛 파도의 길'이 시작되는 영덕군 남정면은 포항시 북구 송라면과 접해 있습니다. 이 길은 작은 항구와 파란 하늘, 쪽빛 바다가 끝없이 이어집니다. 자연의 신비를 가감 없이 보여주는 길, 그래서 가슴에 난 칼날 같은 생채기도 아물게 하는 길입니다. 사시사철 날씨에 상관없고, 해 뜰 무렵과 해거름 모두 빼어난 아름다움을 내보이며 삶에 새로운 에너지를 선사합니다. 길을 걷노라면 베일을 벗듯 바다의 아름다운 풍경에 마음을 풀고 나만의 행복한 시공간을 갖습니다. 이 길이 뜻 깊은 것은 시간을 거슬러 전설과 역사를 아우르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골곡포에 얽힌 수로부인 전설의 신라 향가 '헌화가'를 비롯해 한국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 성공을 위해 북한군을 교환할 목적으로 학도병들에 의해 '장사상륙작전'이 펼쳐진 애국충정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그런 까닭에 한편으론 반갑고, 한편으론 가슴이 저려옵니다.
산과 바다를 이어주는 길, 영덕대게로 유명한 강우항구에서 블루로드 두 번째 '빛과 바람의 길'이 시작됩니다. 역동적인 강구항에서 옮겨 앉은 한적한 산길입니다. 그렇다고 바다가 아예 떠나버린 것은 아닙니다. 저 멀리 소나무 숲 사이로 따라오며 시원한 눈맛을 선사합니다. 숲이 주는 피톤치드에 마음마저 건강해지는 것이 느껴집니다. 봉우리에서 봉우리로 이어지는 그 멀고도 아스라한 곳을 거쳐 마침내 정상에서의 황홀한 성취감은 뭐라 형언할 수 없습니다.
영덕의 진산 고불봉 정상에서 영덕읍을 한눈에 내려다봅니다. 문득 이곳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고산 윤선도 선생을 떠올리며, 치열했던 정쟁의 역사 그 중심에서 대쪽 같았던 선생의 고뇌와, 유배와 은둔의 반복되는 삶 속에서 '오우가', '어부사시사' 등 주옥같은 국문시가문학을 탄생시킨 선생의 탁월한 역량을 떠올립니다.
빛과 바람을 따라 야생화의 환송을 받으며 산에서 내려와 평평한 임도를 무심히 걷다 보면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바람개비의 이국적인 풍경, 풍력발전단지에 마음을 풀고 한참 여유를 부려봅니다. 특히 아녀자들에 의해 풍어와 다산, 그리고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동해의 강강술래 '월월이청청' 기념비가 새롭게 다가옵니다.
동해의 일출이 압권이라는 해맞이 공원에서 블루로드 세 번째 구간 '푸른 대게의 길'을 시작합니다. 바다를 향한 기암의 장엄함과 자연의 신비가 무던한 사람의 마음을 속절없이 흔들어댑니다. 저 멀리 축산면의 상징인 죽도산이 바다에 삿갓을 엎어 놓은 것 같습니다. 일제강점기 어족자원 수탈을 위한 일본인들에 의해 육지로 변했지만, 거슬러 오르면 저 아름다운 섬이 고려 말에는 왜구들의 소굴이었답니다. 되돌아보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섬뜩한 말을 떠올립니다.
죽도를 바라보며 길게 바닷길이 이어집니다. 익숙한 것에 반응하는 귀와는 달리, 새로운 것에 큰 반응을 일으키는 눈이 조물주가 자랑하듯 펼쳐 보이는 장관에 호사를 누립니다. 제아무리 세 치 혓바닥이 장구채 놀 듯 현란하다 할지라도 도무지 침묵할 수밖에 없는 풍경입니다. 쉼 없이 밀려와 부딪치는 물결은 억겁의 시간을 두드려 거친 바위를 매끈하게 다듬었습니다. 마치 시간의 속성인 순종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발효된 사색일수록 더욱 정감이 서린다고 합니다. 그간의 사소하고 잡다하다 생각했던 인연들이 소중하게 다가옵니다. 이렇게 축산면 죽도산까지 바다와 함께했습니다. 길이 신비로운 것은 아름다운 풍경이 있어서가 아니라 이 길을 걸어간 사람들의 이야기가 풍부하게 담겨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축산항을 벗어나 와우산을 넘어 축산면과 영해면의 경계 대소산에 오릅니다. 정상 봉수대에서 바라보는 축산항과 망망대해가 압권입니다. 파란 하늘과 맑은 바다는 그 경계를 잃은 지 오래고, 뭉싯뭉싯 흰 구름이 함께하자 합니다.
고려 시대 때부터 국토의 눈이었던 봉화의 화급한 봉수를 상상하며 애써 괴시리 전통마을로 향합니다. 산 능선을 따라 걸어가노라면 저 멀리 산이 바다가 되어 출렁이고, 바다는 산이 되어 다가옵니다. 이 길이 블루로드 네 번째 구간 '목은 사색의 길'입니다. 고려 말 유학자이자 사상가였던 목은 이색 선생이 인격을 다듬어 학업을 완성하고 그 꿈과 이상을 세상에 펼칠 때 자신이 나고 자랐던 이곳에서 사색에 물들었기 때문입니다. 옛 마을치고 이야기하나쯤 전해 내려오는 곳이 없을까만, 이곳은 역사와 문화가 어우러져 더 풍부한 이야기를 품고 있습니다. 마을 고샅길을 걸어가노라니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거슬러 오르는 느낌입니다. 괴시리를 벗어나 다시 바다로 향하면 뱃사람들의 애환과 사연이 담겨 있는 대진항을 만나게 됩니다. 바다는 이들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 주었지만, 어떤 이들에겐 기억과 갈망으로 흘린 눈물의 시간이 배어있을 것입니다. 이곳 대진해수욕장부터 영동해수욕장, 그리고 블루로드의 새로운 시작이자 끝인 고래불해수욕장까지 명사십리, 즉 금빛 모래와 에메랄드빛 바다, 방풍림 소나무 숲이 함께 이어집니다.
여기까지가 대략 64.6km를 네 번에 걸쳐 걸었던 블루로드에 관한 숨은 사연과 길에 대한 짧은 소회였습니다. 돌아와 일상에 들었지만, 시도 때도 없이 떠올라 마음을 설레게 하는 마법 같은 길, 파란 꿈을 선사하는 이 길이 영덕의 '블루로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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