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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모란을 그리다 / 성보경

부흐고비 2019. 10. 29. 16:46

모란을 그리다 / 성보경
2019 매일시니어문학상 수상작


모란꽃 한 폭이 거실벽면에 피어난다. 녹색과 붉은 색이 대조를 이뤄 우아한 자태를 풍긴다. 그리운 얼굴을 마주한 듯 마음이 따뜻해진다. 가슴에 한 아름 꽃다발을 안아본다.

모란은 목단이라고도 하는데 어머니가 젊은 시절에 자주 그린 소재이다. 초록 톱니 잎사귀 무성한 덤불 사이로 진자주색 쟁반만한 꽃 두 송이가 있고, 그 곁에 앙상블로 한 송이가 자리 잡았다. 그리고 아직 피어나지 않은 꽃봉오리 하나가 다정한 가족처럼 화폭에 담기었다.

어머니는 인자했다. 우아하고 밝은 얼굴로 사람들을 대했다. 꽃처럼 예쁘다는 말을 자주 듣던 당신은 특히 모란을 좋아했다. 봄꽃들이 줄지어 꽃 잔치를 벌인 뒤 신록이 짙어가는 오월 중순이면 뜰 앞 화단에 모란이 피었다. 그때를 기다린 어머니는 마당 모퉁이 그늘에 이젤을 펴고 앉았다. 넉넉하고 화사한 자태를 지닌 꽃을 한참 응시한 후, 희고 고운 손으로 붓을 들었다.

일제 강점기 암울한 시대에 태어난 어머니는 열악한 교육환경 속에서 자랐다. 하지만 뛰어난 두뇌와 재능으로 고등여학교를 졸업한 후, 초등학교 교직을 오랫동안 맡았다.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으며 한평생 신앙에 의지해 살았다. 찬양대 독창자로 활약할 만큼 음악적 재능도 뛰어났다. 인품도 좋아서 모두가 우러러보며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나는 스무 여섯 살에 객지로 나와 약장사 하면서 사회에 첫발을 내딛었다. 주변에 도움의 손길 하나 없이 맨주먹으로 난생 처음 사업을 벌이니 백무가관이었다. 가난한 농촌오지에서 바깥세상 본데없이 살다가 이일저일 닥치는 대로 치다꺼리 하자니 매사에 천방지축이었다. 삶의 가닥이 잡히기 전, 개업 일 년 만에 서둘러 결혼했다.

결혼 당시, 어머니는 갓 마흔둘, 삶이 활짝 핀 꽃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 아들 대하듯 친밀하게 반겨주었다. 긴장하며 경계를 하던 마음은 자연 없어지고 편안한 관계가 되었다. 당신은 신혼 초부터 곁에서 삶의 길을 이끌어 주었다. 생모(生母)는 여덟 살 때 세상을 떠나 성장기 내내 모정에 목말라 살았다. 그러다보니 장모님을 만나 스물일곱 어린애가 되었다. 먼저 가신 어머니의 화신처럼 여겨져 나도 모르게 스스럼없이 대하게 되었다.

첫 아이를 키울 때였다. 갓난 것이 밤낮을 모르고 울어 내가 잠을 설치고 짜증을 부리면 옆방에서 자던 어머니가 놀라 달려와 애기를 업어 밤을 지새웠다. 장사로 바쁜 딸과 사위를 대신해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누이며 손자 셋을 키워낸 건 오롯이 당신의 힘이었다. 젊은 혈기로 허튼짓 하며 바깥을 나돌 때는 성경을 펼쳐 놓고 나를 기다렸다. 그러한 보살핌이 없었던들 오늘날 내 삶의 둥지가 어찌 온전할 수 있었겠나 싶다.

지척에서 내 육신의 건강과 삶을 돌보아 주시던 당신은 93세를 향수하고 하늘나라로 갔다. 삶의 끝자락 병상에 누워 수척해진 몸으로 말 한마디 못하고 신음할 때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어 안타까웠다. 떠나기 이 개월 전 쯤, 어머니는 어지럼증이 심하다며 수혈을 해달라고 했지만 들어주지 못했다. 몇 번 수혈해도 건강이 나아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후회가 앞선다.

아내는 또 밤잠을 설치며 뒤척인다. 가끔씩 넋을 놓고 창밖을 바라보다가 어떨 땐 하염없이 눈물을 찍어내기도 한다. 끼니도 거르기가 일쑤여서 몸이 부쩍 쇠약해져 있다. 어머니와 칠십 여년을 함께 했으니 그 마음이 오죽할까. 내 슬픔보다는 한층 더 할 것이다.

나는 사람이 왜 이 모양인지, 벌써 지난 일처럼 아련하다. 생전의 모습도 다 잊고 잠도 잘 잔다. 세상 사람들은 기른 정이 낳은 정보다 낫다 하는데, 사위 자식 길러봐야 낳은 딸에 비길 수 없는 건가. 그렇지는 않다. 다만 아내처럼 겉으로 드러내지 못할 뿐이다. 당신의 큰 사랑은 하늘같아서 평생 잊을 수가 없다. 함께 살면서 미운 정, 고운 정도 많았다. 그때마다 자식처럼 아껴주고 챙겨주던 어머니였다. 다시 태어나도 당신의 자식, 사위이고 싶다.

어머니가 남긴 모란꽃이 그윽이 나를 내려다본다. 상단에 남긴 「壽, 福, 貴, 和, 吉祥」 다섯 글귀가 내게 전하고픈 염원이었을까. 다 못 갚은 은혜와 사랑은 당신의 딸에게 쏟겠다고 맹서한다. 초록잎사귀 너머에서 모란이 환하게 웃는다. "자네만 믿네." 은은한 목소리가 꽃잎을 돌아 내게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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