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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 이성복


흔히 테니스 선수는 팔로 공을 치는 것이 아니라 허리로 친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팔로 공을 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의식할 때만 몸전체가 돌면서 나오는 힘이 공에 전달된다는 것이다. 또한 피아노를 칠 때 손목에 힘을 주면 어깨로부터 내려오는 힘이 손목에서 딱 끊어지고 손목힘 만으로 치게 된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머리는 제가 아는 것밖에 모른다. 머리는 상식과 체면의 자리이고 신경증의 자리이다.

그런 점에서 공이나 피아노를 칠 때 라켓 헤드와 손가락을 의식하라거나, 돌을 실에 묶어 돌리거나 장도리로 못을 박을 때 돌과 쇠뭉치에 의식이 모인다는 이야기는 문학하는 사람에게도 의미 깊게 들린다.

헤드와 손가락, 돌과 쇠뭉치는 문학에서 바로 언어에 해당한다. 문학은 언어에 기대고, 기댈 뿐만 아니라 투신함으로써 머리의 개입을 막고 몸의 힘을 고스란히 전달하는 것이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캄캄한 밤 배 위에서 쓰레기를 버리려다 쓰레기통과 함께 바다로 떨어졌다는 해군 수병의 이야기와도 같다.

몸의 언어 혹은 언어의 몸은 엄청난 돌파력으로 머리의 언어가 구축한 삶의 가건물을 여지없이 무너뜨린다.

가령 피 흘리며 죽어가는 아들을 무릎에 안은 성모 마리아는 부처님의 어머니 마야 부인을 떠올리게 하며, 마야라는 이름은 환(幻)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마야(maya)와 다른 것이 아니며, 다시 마야라는 말은 피 흐르는 심장을 주먹으로 움켜쥔 마야 문명의 한 사내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참으로 희한하게도 마리아/마야라는 이름을 통해 피가 피를 부르는 것이다. 이는 미술에서의 스크래치라는 기법과 놀랄 만큼 닮아 있다.

며칠 전 나는 ‘동물의 왕국’이라는 프로에서 바다에 사는 해달의 행태를 보면서, 몸의 언어로써의 글쓰기에 대한 그럴 듯한 은유를 발견할 수 있었다.

새끼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하루에 사백 회 가량이나 물질을 하는 어미해달은, 잠수할 줄 모르는 아기해달을 물 위에 발랑 뒤집어 눕혀 놓고 물속으로 들어가는데, 잠수할 수 있는 시간은 고작 4분이라 한다.

글쓰는 사람에게 어미 해달과 아기해달은 한 몸이다.

그는 겉똑똑이 머리를 잠재워 두고 몸속 깊은 곳을 들락거리며 쉼 없이 연상의 물질을 해대는 것이다.

해달이 먹이로 좋아하는 것은 조개류이다. 해달은 해변에서 주워온 돌을배 위에 올려놓고 그 위에다 조개를 내리쳐 살을 꺼내 먹는데, 해달의 등뼈와 갈비뼈는 그 충격을 견뎌낼 만큼 견고하다. 재미있는 것은 해달이 조개의 빈 껍질을 배 위에 놓고 접시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글쓰는 사람에게 조개껍질은 언어가 아닐까.

언어는 글쓰는 사람 자신의 몸 위에서 갈라지고 부서지며, 딱딱한 일상의 외피를 벗고 나서야 비로소 부드러운 속살을 드러낸다.

그리하여 속살을 걷어낸 한 언어의 껍질은 다른 언어의 속살을 담는 받침이 되는 것이다.

해달은 바다 밑에 뿌리를 두고 수십 미터 웃자란 해초 다발에 몸을 감고 잔다. 그것은 밤새 높은 파도에 떠밀려 가거나 해변이나 바위에 부딪히지 않기 위해서라고 한다.

몸의 언어로 글쓰기도 그런 것이 아닐까. 누군가 글쓰기가 욕조를 타고 대서양 건너는 일과 같다고 했지만, 언어라는 연약한 물풀에 몸을 감고 밤새 뒤척이며 날 밝기를 기다리는 것.

내가 본 프로에서 어미 해달은 폭풍이 몰아치던 밤 파도에 휩쓸려 떠내려가고, 물질도 할 줄 모르는 아기해달만 남아 떨고 있었다.

글쓰는 사람이여!, 당신도 그런 느낌이 들 때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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