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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인연 / 피천득

부흐고비 2020. 2. 24. 10:59

인연因緣 / 피천득1


지난 사월, 춘천에 가려고 하다가 못 가고 말았다. 나는 성심 여자 대학에 가 보고 싶었다. 그 학교에, 어느 가을 학기, 매주 한 번씩 出講(출강)한 일이 있었다. 힘 드는 출강을 한 학기 하게 된 것은, 주 수녀님과 김 수녀님이 내 집에 오신 것에 대한 예의도 있었지만, 나에게는 사연이 있었다. 수십 년 전, 내가 열일곱 되던 봄, 나는 처음 도쿄에 간 일이 있다. 어떤 분의 소개로 사회 교육가 M선생 댁에 留宿(유숙)을 하게 되었다. 시바쿠(芝區)에 있는 그 집에는 주인 내외와 어린 딸, 세 식구가 살고 있었다. 하녀 도 書生(서생)도 없었다. 눈이 예쁘고 웃는 얼굴을 하는 아사코(朝子)는 처음부터 나를 오빠같이 따랐다. 아침에 낳았다고 아사코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고 하였다. 그 집 뜰에는 큰 나무들이 있었고, 一年草(일년초) 꽃도 많았다. 내가 간 이튿날 아침, 아사코는 스위트 피를 따다가 화병에 담아, 내가 쓰게 된 책상 위에 놓아 주었다. 스위트 피는 아사코 같이 어리고 귀여 운 꽃이라고 생각하였다.

성심 여학원 소학교 일학년인 아사코는 어느 토요일 오후, 나와 같이 저희 학교에까지 산보를 갔었다. 유치원부터 학부까지 있는 가톨릭 교육기관으로 유명한 이 여학원은, 시내에 있으면서 큰 목장까지 가지고 있었다. 아사 코는 자기 신장을 열고, 교실에서 신는 하얀 운동화를 보여 주었다. 내가 도쿄를 떠나던 날 아침, 아사코는 내 목을 안고 내 빰에 입을 맞추고, 제가 쓰던 작은 손수건과 제가 끼던 작은 반지를 이별의 선물로 주었다. 그 후, 십년이 지나고 삼사년이 더 지났다. 그 동안 나는, 국민학교 일학년 같은 예쁜 여자 아이를 보면 아사코 생각을 하였다.

내가 두 번째 도쿄에 갔던 것도 사월이었다. 도쿄역 가까운 데 여관을 정하 고 즉시 M선생 댁을 찾아갔다. 아사코는 어느덧 청순하고 세련되어 보이는 令孃(영양)이 되어 있었다. 그 집 마당에 피어 있는 목련 꽃과도 같이. 그 때, 그는 성심 여학원 영문과 3학년이었다. 나는 좀 서먹서먹했으나, 아사 코는 나와의 再會(재회)를 기뻐하는 것 같았다. 아버지, 어머니가 가끔 내 말을 해서 나의 存在(존재)를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그 날도 토요일이었다. 저녁 먹기 전에 같이 산보를 나갔다. 그리고, 계획 하지 않은 발걸음은 성심 여학원 쪽으로 옮겨져 갔다. 캠퍼스를 두루 거닐다가 돌아올 무렵, 나는 아사코 신장은 어디 있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는 무슨 말인가 하고 나를 쳐다보다가, 교실에는 구두를 벗지 않고 그냥 들어간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갑자기 뛰어가서 그 날 잊어버리고 교실에 두고 온 우산을 가지고 왔다. 지금도 나는 여자 우산을 볼 때면, 연두색이 고왔던 그 우산을 聯想(연상)한다. 「쉘부르의 우산」이라는 영화를 내가 그렇게 좋아한 것도 아사코의 우산 때문인가 한다. 아사코와 나는 밤늦게까지 문학 이야기를 하다가 가벼운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새로 출판된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세월」에 대해서도 이야기한 것 같다.

그 후 또 십여 년이 지났다. 그 동안 제2차 세계대전이 있었고, 우리나라가 解放(해방)이 되고, 또 한국 전쟁이 있었다. 나는 어쩌다 아사코 생각을 하곤 했다. 결혼은 하였을 것이요, 전쟁통에 어찌 되지나 않았나, 남편이 戰死(전사)하지나 않았나 하고 별별 생각을 다 하였다. 1954년, 처음 미국 가던 길에 나는 도쿄에 들러 M선생 댁을 찾아갔다. 뜻밖에 그 동네가 고스란히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M선생네는 아직도 그 집에 살고 있었다. 선생 내외분은 흥분된 얼굴로 나를 맞이하였다. 그리고, 韓國(한국)이 獨立(독립)이 되어서 무엇보다도 잘 됐다고 致賀(치하)하였다. 아사코는 전쟁 이 끝난 후, 맥아더 司令部(사령부)에서 번역 일을 하고 있다가, 거기서 만 난 일본인 2세와 결혼을 하고 따로 나가서 산다는 것이었다. 아사코가 전쟁 未亡人(미망인)이 되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다. 그러나, 2세와 결혼하였다 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만나고 싶다고 그랬더니, 어머니가 아사코의 집으로 안내해 주었다.

뾰족 지붕에 뾰족 창문들이 있는 작은 집이었다. 이십여 년 전 내가 아사코 에게 준 동화책 겉장에 있는 집도 이런 집이었다.
『아! 이쁜 집! 우리, 이담에 이런 집에서 같이 살아요』 아사코의 어린 목소리가 지금도 들린다. 십년쯤 미리 전쟁이 나고 그만큼 일찍 한국이 독립되었더라면, 아사코의 말대로 우리는 같은 집에서 살 수 있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뾰족 창문들이 있는 집이 아니라도. 이런 부질없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 집에 들어서자 마주친 것은 백합같이 시들 어 가는 아사코의 얼굴이었다. 「세월」이란 소설 이야기를 한 지 십년이 더 지났었다. 그러나, 아직 싱싱하여야 할 젊은 나이다. 남편은 내가 상상 한 것과 같이 일본 사람도 아니고 미국 사람도 아닌, 그리고 進駐軍(진주군) 將校(장교)라는 것을 뽐내는 사나이였다. 아사코와 나는 절을 몇 번씩 하 고 악수도 없이 헤어졌다.

그리워하는 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 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오는 週末(주말)에는 춘천에 갔다 오려 한다. 소양강 가을 景致(경치)가 아름다울 것이다.

  1. 皮千得: 호는 금아(琴兒)이다. 1910년 5월 29일 서울에서 태어나 중국 상하이[上海] 공보국 중학을 거쳐 1937년 호강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했다. 일제강점기 때 경성중앙산업학원 교사로 근무했고, 8·15광복 직후인 1945년 경성제국대학 예과교수를 거쳐 1946 ~ 1974년까지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수로 재직했다. 1946년 서울대학교에서 영시(英詩) 강의 시작, 1954년 미국 국무성 초청으로 하버드대학교에서 1년간 영문학을 연구하였으며, 1966년 서울대학교 대학원 학생과장을 역임했다. 2007년 5월 25일에 세상을 떠났다. 1930년 《신동아》에 《서정소곡(抒情小曲)》을 처음으로 발표하고 1932년 《동광》에 시 《소곡(小曲》(1932), 수필 《눈보라 치는 밤의 추억》(1933) 등을 발표하여 호평을 받았다. 대체로 투명한 서정으로 일관, 사상·관념을 배제한 순수한 정서에 의해 시정(詩情)이 넘치는 생활을 노래하였다. 첫 시집 《서정시집》(1947)에는 그리움을 꿈으로 승화시킨 《꿈》이나 《편지》, 소박하면서도 전통적인 삶의 서정을 노래한 《사랑》 따위의 동심과 자연을 노래한 시가 상당수 실려 있다. 그의 문학세계는 시보다 오히려 수필을 통해 진수가 드러난다. 생활에 얽힌 서정적이고 주관적·명상적인 것을 소재로 삼는 그의 수필은 섬세하고도 다감한 문체로써 서정의 세계를 수필화하고 있다. 대표적 수필로 1933~1934년에 발표한 《눈보라 치는 밤의 추억》 《기다리는 편지》 《은전 한 닢》등이 있다. 그외에도 특히 《수필》은 수필 형식으로 쓴 수필론으로, 은유법을 적절히 구사해서 수필의 본질과 특질을 잘 나타낸 그의 대표적 작품이다. 이밖에도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는 토머스 엘리엇(Thomas Stearns Eliot)의 시구를 부정하면서 봄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는 《봄》, 여성의 미는 생생한 생명력에서 온다는 《여성의 미》, 지휘자보다 무명의 연주자를 택하겠다는 《플루우트 플레이어》, 영국 대사관에서의 엘리자베스 여왕 생일 축하 가든파티에 참석한 소회(所懷)를 쓴 《가든 파아티》, 성모 마리아상과 같은 구원의 여인상을 찾는 《구원의 여인상》 등 수많은 수필 작품이 있다. 수필 이외의 작품으로는 시집 《금아시문선》(1959)과 《산호와 진주》(1969), 번역서 《소네트의 시집》(1976), 평론 《노산시조집을 읽고》(1932)와 《춘원선생》(1961) 등이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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