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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법고 소리 / 박시윤

부흐고비 2019. 11. 24. 17:03

법고 소리 / 박시윤
2012 《계간 동리목월》 겨울호


뉘엿뉘엿 넘어가던 해가 운문산 꼭대기에 걸터앉았다.

종루를 지나 운문사 마당을 서성인다. 저녁 예불 시간, 첫 법고 소리를 만났다. 사바세계를 일깨우는 듯 소리가 장엄하다. 북적대던 인파의 걸음도 잠시 멈춰 섰다. 모두가 소리에 마비되어 그림자조차 움직이지 않는다. 낮과 밤의 경계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에 나는 밤을 택했고, 해거름이 마당 안으로 발길을 들여놓자 법고 소리는 고요와 섞여 산사山寺의 거룩한 밤을 알린다.

루壘에 자리한 법고 앞에 세 명의 여승이 섰다. 회색빛 장삼에 진한 감색의 가사를 드리운 뒤태가 사뭇 진지하다. 날개가 있으되 날지 않는 나비 같다. 여승은 법고 앞에 고개를 숙인다. 손에 들려진 두 개의 북채로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 한참의 침묵은 긴장을 불러온다.

내가 막 발걸음을 돌리려는 순간, 여승이 북채를 든 양 손을 치켜들었다. 적막 속에 숨을 고른 후 세심한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둥- 둥- 둥-, 드디어 허공을 향해 있던 북채가 번갈아가며 북의 중앙을 때린다. 심장을 얻어맞은 장엄한 소리가 바람의 파장을 타고 혼을 깨워내기 시작한다. 바람을 타고 퍼지는가 싶더니 이내 천년의 소리답게 한 곳을 향해 힘차게 뿜어져 나간다.

속세의 어지럽고, 현란한 소리와는 사뭇 다르다. 가락과 높낮이는 바람이 달려가는 곳보다 몇 곱절 더 멀리 끝을 미친다. 굵고 강하게 직선으로 뻗어 가다가 고요의 침묵이 기거하는 곳에서는 스멀스멀 느리고도 엷게 번져 나간다. 나직하게 깔리는 밤의 소리는, 서서히 물결을 어루만지는가 싶더니 다시 튕겨져 하늘과 땅을 메아리치듯 반복적으로 굴러간다. 느리게 한곳으로 고여 흡수되는 듯싶더니 이내 웅장하게 천지를 뚫고 승천한다. 산사는 곧 소용돌이를 이루며 용솟음치는 소리에 휩싸인다. 뻗어가던 소리는 산자락에 부딪혀 다시 소리를 낳고, 잘게 분해되어 안개처럼 아늑하게 처마 위로 떨어지며 사라진다.

여승의 손놀림은 점점 빠르게 내달린다. 조금의 기교도 없이 굵고도 정직하다. 게으름의 군살 하나 없는 체구의 행위에서 뿜어대는 형태는 웅장하다. 법고를 다루는 내내 북채는 한 번도 여승의 몸을 기웃대거나 탐하지 않는다. 길고 폭이 넓은 장삼 자락이 북채에 휘말리거나 제 멋대로 요동치지도 않는다. 속도감에 익숙한 듯 자연스럽게 파장을 일으키며 춤을 추었고, 그들만의 익숙한 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질서를 감각적으로 찾아간다. 서로가 서로의 호흡을 맞추며 흐름을 따를 때 비로소 소리는 장엄하게 조화를 이루었다. 소리는 질서 없는 질서로 일어서고 멸했다.

여승은 자신의 동작 같은 건 생각할 겨를이 없어 보인다. 오로지 법고의 울림에만 취해 있다. 어쩌면 그토록 다다르고자 하는 근엄한 구도의 길이 바로 법고의 울림에 있지 않을까 싶다. 여승도 나도 소리를 만들고 듣는 동안 무아지경에 빠져든다. 여승의 동작에는 혼이 스며있는 듯하다. 동작을 사색하는 내내 온몸이 터질 듯 소리들이 들어와 와글거렸다. 정신이 혼미해질 만큼 소리는 거대하다. 나를 지탱하고 있는 심장보다 더 생생히 내 영혼을 만지고 있는 소리에 눈과 귀가 멀 것만 같다.

아찔한 현기증이 인다. 파장을 일으키며 자연의 곳곳으로 스며든 소리가 어둠과 함께 영원의 세계 속으로 나를 몰고 간다. 가죽 있는 축생에게, 땅 위에 기거하는 모든 생명들에게 진리를 전한다는 법고소리를 들으며 나는 무엇엔가 홀린 듯 현기증을 이기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가슴으로 용서하지 못한 아픔이 있거든, 손에 잡히지 않는 욕망이 있거든 지금 이 법고의 소리 속에 산산이 띄워 보내라고, 울림은 크게 꾸짖으며 진리를 전하고 있는 듯하다. 뒤이어 펼쳐진 소리들 속에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잠겨 있다.

물속의 중생을 천도한다는 목어木魚, 하늘을 나는 새와 허공을 헤매는 영혼을 천도하는 운판雲版, 지옥에서 헤매는 중생까지 돌아본다는 대종大鐘 소리에 다다르기까지 여승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정직하였다. 소리의 파장이 장엄하고 웅장하게 흐르는 동안 산천초목은 고즈넉한 밤을 맞았고, 천지의 생명들은 아늑한 극락의 세계로 들어가려는 듯 잔잔하다. 장엄한 소리들이 모두 분해되고서야 나는 다시 눈을 떴다.

고요하다. 나는 어둠에 섞여 오래토록 산사에 머물렀다. 예불 소리가 낮게 깔리기 시작한다. 소름이 돋을 만큼 여승들의 소리는 어둠보다 낮게 깔리며 진동한다. 밤보다 더 깊게 산사를 돌아 스물스물 처마를 뚫고,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을 향해 치솟는다. 종교를 초월해 그들의 소리는 순결하고, 거짓이 없다. 듣는 내내 속세의 허물이 퉁퉁 불어 벗겨지듯 온몸이 땀으로 흥건하다.

인생은 늘 무의미 속에서 견디기 힘겨웠다. 불쑥불쑥 찾아드는 육신의 고단함과 불안의 내면에 사로잡혀 꼼짝달싹도 못하고 눈만 깜빡거리는 우울감이 수시로 나를 보챘다. 현실의 멀미 속에 잘난 사람들은 더욱 나를 어둠 속에 배회하게 만들었다. 생각의 덫은 좀처럼 나를 자유로이 풀어 놓지 않았고 굴레를 맴돌곤 했다. 나는 잔다르크처럼 혁명을 꿈꾸며 세상에 분노했다.

반항이었다. 내 곁을 맴도는 모든 것들에 대한 화답은 단답형으로 싸늘했으며, 살점을 한 움큼씩 뜯어내는 미늘과 같았다. 혁명을 가장한 반항은 절망으로 나를 끌어들였고, 그런 수렁을 허우적대며 젊음을 함부로 낭비해 버리고 싶었다. 젊음은 거추장스런 사치였다. 삶의 밝음보다 어둠의 뒤에 펼쳐질 죽음을 엿보며 절망도 극락이라 애써 믿고 싶었다.

이루고 싶은 꿈이 뭔지도 기억하지 못할 만큼 나는 나약해져 버렸다. 혁명을 바라며 일어섰던 두 주먹에 힘이 풀릴 즈음 이미 꿈을 잃고 갯 무덤으로 밀려나 있었다. 나 따위가 꿈을 꾼다는 것은 신성하게 꿈을 꾸는 사람들을 모독하는 행위와도 같다고 생각했다. 살고 싶은 의지가 내게는 하나도 없었다. 스스로가 쳐 놓은 덫에 걸려 학대하고 고문하며, 그것이 내가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랑법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비워라, 마음을. 내려놓아라, 짐을. 억겁의 욕심이 있거들랑 지금 다 비우고 내려놓아라.’ 시선을 돌리니 어둠을 흠뻑 뒤집어쓴 소나무 한 그루가 고고히 서서 두 손 모아 합장을 하고 있다. 운무처럼 뭉게뭉게 내리뻗은 가지 위로 솔잎은 억겁의 세월을 이루고 돋아 있다. 혼자였음에도 강인함이 묻어났으며, 무엇 하나 치장하지 않았음에도 푸르름으로 화려했다. 오랜 시간 속에 뇌리에 박힌 불심으로 염불이라도 하려는 듯 제 품을 바닥으로 한껏 늘어뜨려 놓았다. 누군가의 손길이 닿았던 것일까. 그의 겸허한 낮춤을 보다 못해 안쓰러운 마음으로 받침대를 받쳐 주었다. 오백 년 용처럼 승천하는 꿈도 마다하고 스스로를 낮추었던 나무에게 손길을 더한 이는 또 얼마나 많은 욕심과 세속을 버리고 남을 배려했을까.

삐침의 솔잎들은 철마다 가지런히 피어올랐고, 인내하고 기다릴 때마다 가지가지에 사리처럼 오롯한 솔방울들이 돋고 졌다. 단아하고 다소곳하게 치마폭을 펼치고 자리를 잡은 소나무의 곁에서 풍겨지는 기품이 넉넉한 극락의 품이 아닐까를 상상했다. 나는 바닥으로 시주된 솔방울 두어 개를 주웠다.

누군들 사연 하나 가슴에 품지 않고 이곳에 발을 들였을까. 이 나무 역시 잊어야 할 것들이 어찌 없었을까. 세속의 정을 뒤로하고 출가하기까지 또 얼마나 많은 것을 잠재우고 버렸을까. 나무인들, 짐승인들 출가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벗어버린 속세의 인연을 초월해 나무는 가장 낮은 곳까지 욕심과 번뇌를 누르고 내려가고 있었다. 누군가의 시린 가슴을 생각하다 보니 목적 없이 순결했다던 내 걸음이 본심을 드러낸다. 그래. 나는 불편한 마음을 비우고 허한 마음이나 위로받을까 하여 여기에 왔다.

해지기 전, 바삐 오가던 여승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달빛처럼 환-했던 그들의 얼굴에는 한 결 같이 편안함이 깃들어 있었고, 다 내려놓은 듯 욕심이 없이 맑아 보였다. 속세의 연을 끊어내듯 머리카락마저 미련 없이 잘라버린 매끈한 두상에 화장기 없는 얼굴, 눈과 코, 입술. 얼핏 보아 모두가 그 얼굴이 그 얼굴인 듯 부처의 상을 닮아 있었다. 어둠 속에 여승이 걸어 들어간 곳을 바라보았다. 한없이 적막할 것만 같은 그 길 위로 촘촘하고 고단한 나의 시선이 뒤따르고 있었다.

소나무가 나를 다독이듯 바람에 미세하게 흔들린다. 처진 채 드리워진 그의 품이 얼마나 넉넉하였으면 오백 년 동안 거쳐 간 마음들을 넉넉히 잠재워 주었을까. 서두르지 않고 묵묵히 기다리며 인내하는 일을 몸소 실천하는 처진 소나무를 보며 나도 이제 허깨비 같은 울분을 누그러뜨리고 느리게 살고 싶어진다.

밤하늘에 떠있는 별을 보는 순간 두고 온 아이들이 생각났다. 눈시울이 미치도록 뜨겁다. 다시 채근해지려는 순간, 숲에서 소리 하나가 달려와 등을 다독인다. 법고를 울리는 여승의 동작 속에 북채는 헤아릴 수 없는 마음 ‘심心’자를 그리며 우주만물을 달랜다고 한다. ‘기다림’이란 어쩌면 속세에서 선계로 이어지는 들목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슴에 품으며 발길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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