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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집 / 박시윤

부흐고비 2019. 11. 24. 21:22

집 / 박시윤


결혼한 동창이 집들이를 한다는 연락을 보내왔다. 친구는 서른 중반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중매로 만나 석 달 만에 결혼식을 치렀다. 늦은 결혼을 자랑이라도 하듯 마흔 평이 넘는 새 아파트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유명 상표의 혼수들로 속을 꽉 채운 집은 보기에도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만큼 화려했다. 시댁 이야기며 남편 이야기를 줄줄이 늘어놓는 그녀의 달콤한 신혼 자랑에 맞장구를 치면서도 왠지 즐겁지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모퉁이에서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휑했다. 환한 달빛이 앞을 비춰 줄 것이라는 생각과 늦은 밤 남편이 나를 기다려 줄 것이라는 기대는 일찌감치 접었다.

현관에 들어서자 쥐죽은 듯 고요한 공기가 나를 더욱 숨죽이게 했다. 늦은 귀가에 면죄 받지 못할 죄인처럼 뒤꿈치를 들고 방문을 열었다. 12년 전 남편을 따라 들어온 이 집의 냄새는 언제나 변함이 없다. 달콤한 신혼의 향기는 홀시어머니의 손때 묻은 살림에 묻혀 나를 거부하고 있는 듯했다. 오래토록 마음을 내려놓지 못하고 이방인처럼 시어머니의 눈치를 살피며 살았다.

집들이에 다녀온 뒤 며칠을 앓았다. 누가 뭐라 한 것도 아닌데 괜한 짜증과 한숨이 났다. 꽃샘추위에 밖을 쏘다녀 몸살이 난 거라고 단정 짓는 시어머니보다 이유를 알고도 태연하게 못 본 척하는 남편이 더 야속했다. 문틈으로 까르르 목젖 넘어가는 두 아이의 웃음과 남편의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새어들었다. 분명 남편은 웃고 있으면서도 내 눈치를 살폈을 것이다.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귀를 틀어막았다. 제 아무리 여자의 행복은 가족이 근원이라고는 해도 가족을 보면서 마냥 꽃 피고, 새 우는 봄날 같을 수만은 없지 않은가.

때로는, 이 집이 지긋지긋할 때가 있다. 가족들의 뒤치다꺼리가 천근만근 버거웠다. 늘 나는 오간 데 없고 내가 아닌 낯선 아낙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집, 그러면서도 한 번도 거부하지 못하고 나를 누르고 죽이며 들어와야 했던 집이었다.

오며가며 참 바쁘게 지나다녔던 골목이다. 집으로 향하는 이 골목은 거역할 수 없는 집으로의 숙연한 내 자세를 가다듬는 세월의 일부일지도 모른다. 나의 치부를 알고도 묵묵히 침묵하며 올곧게 나를 인도했던 길이다.

어느새 열두 해째다. 큰아이의 나이를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면 내가 이 집에 들어온 햇수도 헤아리지 못했을 것이다. 신혼의 단꿈도 모르고 결혼과 동시에 시댁으로 들어왔다. 분가하여 오붓이 살고 싶은 욕심이 일렁일 때면 달빛에 남겨진 항아리처럼 웅크리고 앉아 소리 없이 울었다. 눈물바람도 팔자 좋은 년들이나 하는 거라는 친정어머니의 말대로라면 나는 분명 울어서는 안 되는 여자였다.

시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보름 만에 치른 결혼식은 울음바다였다. 신혼살림 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시어머니의 뜻에 따라 시댁으로 들어왔다. 시어머니 세간에도 비좁았던 이 집에 나의 혼수는 아예 들어올 틈이 없었다. 그렇게 나는 우습게도 숟가락 한 벌만 들고 시집을 왔다. 시어머니의 세간들은 아무리 닦고 쓸어도 윤이 나지 않았다.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신혼의 단꿈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친구들이 기대하는 집들이는 묵살한 지 오래였다. 시어머니의 집에 들어와 혼자만의 공간 하나 없이 살아가는 나의 구닥다리 삶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가슴은 들판처럼 늘 쓸쓸하기만 했다. 알코올이 삼켜버린 유년의 집은 추웠다. 빚보증을 잘못선 아버지는 무척 예민하셨다. 집은 희망 하나 싹트지 못하는 공포의 대상이었으며, 싸늘히 식어가는 죽음의 구덩이와도 같았다. 집을 벗어나려고 얼마나 많은 방황을 했는지 모른다.

나의 소원은 집을 가져보는 것이었다. 나만의 보금자리를 꿈꿨다. 하지만 나는 단 한 번도 집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하루에도 수백, 수천 개씩 층수를 높여 가는 아파트를 올려다보며 내게도 나만의 집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눈물짓던 날이 많았다. ‘미분양 세대 파격 분양, 지금이 내 집 마련 절호의 찬스!’ 다 부질없는 현수막들의 말장난이었다.

집들이의 여파에서인지 몸살은 오래토록 지속되었다. 온몸에 식은땀이 흐르고 현기증으로 정신을 잃을까 두렵기까지 했다. 머리만 바닥에 뉘면 잠이 쏟아졌고, 몽글몽글한 꿈에서의 여운은 깨고 나서도 쉬이 잊어지질 않았다. 한겨울에 밤을 줍기도 하고, 큰 비단잉어를 품에 안기도 했다.

“여기 보이시죠? 벌써 집이 생겼네요.” 초음파로 몸 상태를 살피던 의사가 작은 점 하나를 보여준다. 아기가 내 몸에 집을 지었다는 것이다. 의사는 잘 지은 집이 무너지지 않게 몸을 아끼고 또 아끼라며 거듭 당부한다. 달이 찰수록 아기집은 바다가 되어 점점 커져갔고, 그 속을 누비는 아기의 몸놀림도 제법 힘차게 요동쳤다. 집은 늘 고요한 물결로 일렁였고, 세상에서 가장 아늑하고 화려한 꿈을 잉태하는 집이 되어가고 있었다.

집은 좁았다. 집 주인의 꿈이 자랄 때마다 비좁은 집은 터질 듯했다. 숨통이 조여 오고 찢어질 듯한 아픔이 찾아왔다. 아이는 더 큰 꿈을 꾸며 제 집을 떠나 화려하게 볕이 드는 나의 마당 깊은 집으로 오려 했다.

별들이 가루가 되어 떨어지고 보름달이 밝던 새벽, 나는 어금니를 물고 아기에게 좁은 문을 힘껏 열어주었다. 아버지가 잘못된 보증을 서고 전답과 두 채의 집을 날렸던 고통보다 더 아프게 아이는 제 집을 벗어나고 있었다. 누추한 집이라도 같이 부대끼며 가족의 살가운 정을 품고 싶어 찾아온 아이가 고마웠다.

집에 식구 하나가 더 늘었다. 시어머니는 대문에 새끼를 엮어 고추를 끼워 거셨다. 남들은 쉽게 애 낳았다고들 하지만 제 몸에 집을 지어본 여자들은 알 것이다. 집 하나 짓기가 어디 그리 쉬운 일이던가. 제 살던 집을 버리고 같이 살자고 온 아이를 안고 너무도 벅차 며칠 밤을 하얗게 지새웠다.

그러고 보니 나도 한때는 집이 있었다. 아주 오래 전 아무도 엿보지 못했던 평온하고 고요한 혼자만의 집, 나는 평생 그 집을 잊고서 내 집 한 칸 가져보지 못했다고 투덜대며 살아왔다. 문패도 없이 그저 어머니의 배꼽 하나 앞세워 달세도 내지 않고 당당히 살다 온 집이었다.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결혼 후 몇 년이 지나도 집이 지어지지 않는다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수차례의 인공수정과 시험관아기까지 죄 실패로 돌아갔다고 한다. 명품의 혼수들이 가득한 그녀의 집이 냉랭하게 식어가는 듯 보였다. 그녀도 나처럼 따뜻한 집을 지어 보고 싶은 걸까.

나의 집을 본다. 날마다 햇살처럼 반지르르 흘러내리는 아이의 웃음과, 북적이며 들끓는 아이의 꿈이 집을 가득 채우고 있다. 비좁다. 그러나 이 비좁음마저도 행복이리라. 꿈을 품어 늘 따뜻하고, 올곧은 기둥이 서 있는 유일한 나의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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