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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게 고치고 다듬는 세 가지 전략 / 김영남


화초를 키우다 보면 두 가지 경우에 부딪친다. 하나는 화초의 싹이 처음부터 싱싱하고 튼튼해서 자라는 데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아도 나중에 예쁜 꽃봉오리를 절로 맺는 경우이고, 또 하나는 아무리 돌봐주고 신경을 써도 화초가 뜻대로 성장하지 않는 경우이다. 즉 화초의 장래가 처음부터 싹이 노란 것이다.

시 쓰기에도 화초의 이러한 감정법이 적용된다. 잘 가꾸면 보기 좋은 꽃이며 튼실한 열매를 가지가 휘도록 매달아줄 시가 있는가 하면, 가꾸어 보았자 애만 닳을 뿐 결코 좋은 열매를 볼 수 없는 시가 정해져 있다. 이 때문에 나는 초고를 써 놓은 다음에는 반드시 될성부른 나무인가부터 감정을 한다. 구조가 탄탄하고 가슴에 울림이 오는 녀석은 본격적인 다듬기에 들어가지만, 처음부터 싹수가 노란 시, 싱싱하지 못한 시는 아예 버리고 만다.

따라서 나의 시 고치기에는 별다른 힘이 들지 않는다. 대개 부분적인 손질로 끝나거나 시행을 추가시키는 일이 전부이다. 연을 통째로 고쳐야 할 만큼 대작업이 필요한 시라면 아예 싹수가 노란 시로 분류해 미련 없이 휴지통으로 날려 버린다. 그러면 적게 고치는 시, 성공도가 높은 시를 어떻게 하면 쓸 수 있을까?

시 쓰는 사람이면 누구나 나름의 비방을 갖고 있겠지만 나의 경우에는 적게 고치기 위해 남보다 유별나게 강조하는 몇 가지 원칙이 있다.

그 첫 번째 원칙은 오브제의 선택이다. 가능한한 변용이 쉬운, 즉 쉽게 이중구조를 구축할 수 있는 오브제를 선택하는 것이다. 변용이 쉽지 않는 것이라도 그 오브제 자체에 다의성을 함축하고 있는 것을 선별해서 활용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방안을 한번 살펴보자. 방에는 창, 벽, 책상, 책, 스탠드, 연필, 재떨이, 옷 등이 있다. 이 중에서 변용이 가장 쉬운 오브제를 고르라면 누구라도 ‘창’과 ‘벽’을 택할 것이다. ‘창’과 ‘벽’이 다른 것들에 비해 가장 변용하기 쉽고, 메타포를 쉽게 구축할 수 있는 소재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창’은 현실의 창, 인생의 창, 내면의 창, 지식의 창, 학문의 창, 유년의 창… 등으로 상상을 쉽게 변용해서 확대해 나갈 수 있고, 그에 따라 메타포가 잘 형성될 수 있다.

둘째로는 시의 첫줄에 강력한 긴장이 흐르도록 하는 것이다. 도입부가 긴장과 흥분을 자아내야만 시를 읽는 이의 호기심을 자극시킬 수 있다는 작시법의 전략 때문이다. 나아가 도입부의 긴장은 전개부의 상상력을 증폭시키고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촉매 역할을 갖는다. 도입부의 긴장은 또한 상상력의 빈약함이나 엉뚱한 진행을 막을 수도 있다.

그러면 어떤 문장이 긴장과 흥분을 갖게 하는가? 내용상으로는 동기부가 생략되었을 때 문장에 탄력이 생긴다. 물론 여기에는 대상을 남다르게 파악하는 표현, 즉 독특한 발상이 기본적인 바탕을 이루어야 한다.

셋째로 내가 신경 쓰는 원칙은 구조상 마무리에 증폭이 가해질 수 있는가, 없는가를 따져보는 것이다. 마무리는 작품의 작품성, 작가의 철학성 등 깊이를 평가받을 수 있는 항목이다. 실제로 뚜렷한 마무리가 예상되는 시는 쉽게 써지고, 또한 전개나 전환 부분이 약간 미진하더라도 훌륭한 마무리 덕택에 별달리 결점이 노출되지 않는다.

그래서 나의 경우에는 시의 첫줄과 마무리가 훌륭하게 구상되면 나머지 부분은 거의 무수정 상태로 채워져 한 편의 시가 태어나게 된다. 쓰고 난 다음 퇴고를 행할 때에도 구절을 보완하는 경우는 있지만 대폭적으로 고치는 경우가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면 실제에 있어서 어떻게 시를 적게 고치고, 완성하는지 한 번 살펴보자.

언젠가 나는 소설책을 읽다가 눈길을 확 잡아끄는 다음과 같은 표현을 발견하였다. ‘그에게는 말뚝에 붙들어 맬 수 없는 고집이 있다.’ 이 표현이 너무 맘에 들어서 나는 얼른 노트에 채집해 두었다.

그러던 어느 날 벤치에 앉아 있다가 문득 담을 타고 오르는 덩쿨을 발견하고서는 ‘그래, 바로 저거다’ 하고 탄성을 질렀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메모를 하였다.

땅을 기어가는 것들에는①
기둥에 붙들어 맬 수 없는 고집이 있다.
황토밭을 달리다가 잠시 뒤돌아보는 고구마순,
벽을 기어오르며 허공에 내미는 담쟁이손,
이것들에게는 허리가 꺾이고 발목이 묶이더라도
오로지 가고야 말겠다는 강인한 근성이
무섭도록 꿈틀댄다.
그 구불구불한 줄기를 들치면②
어둔 싹들을 이 세상으로 업어낸③
아름다운 등이 있다.

이렇게 메모를 한 다음 몇 주일 후에 이것을 다시 꺼내놓고 검토했다. 시로 완성시키기에 충분한 오브제인지, 도입부의 긴장과 마무리의 증폭이 효과적인지 면밀하게 따져보았다. 다행하게도 시로 완성시키기에 충분하다는 판단을 하기에 이르렀다.

즉, ①을 시의 처음으로 삼고, ③을 결론으로 삼으면 좋은 시가 탄생할 것 같았다. 문제는 전개부와 전환부가 다소 허약하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전개, 전환부란 마무리로 몰아나갈 수 있는 기능이면 족하다. 그런데 이 작품은 이미 흡족한 마무리를 확보하고 있지 않은가. 이렇게 생각하자.

의외로 쉽게 그 실마리가 풀려나갔다. ‘그래, ②에 살을 붙여 ③의 결론을 얻는 데 합당한 나의 이야기를 집어넣는 거야’. ①의 중심 모티브가 강인한 근성이라면 ②의 전개부에서는 그 근성을 형상화할 수 있는 어머니를 중심 모티브로 삼았다. 어머니야말로 실로 무한한 변용의 가능성을 갖고 있는 말이 아닌가. 일단 중심 모티브를 잡아내고 나면 그 다음의 묘사는 순조롭게 마련이다. 그래서 거의 무수정 상태로 다음과 같은 한 편의 시를 얻을 수 있었다.

땅위를 기어가는 것들에는

땅을 기어가는 것들에는
기둥에 붙들어 맬 수 없는 고집이 있다.
황토밭을 달리다가 잠시 뒤돌아보는 고구마순,
벽을 기어오르며 허공에 내미는 담쟁이손,
이것들에게는 허리가 꺾이고 발목이 묶이더라도
오로지 가고야 말겠다는 강인한 근성이
무섭도록 꿈틀댄다.

그 구불구불한 줄기를 들치면
대나무 뿌리같은 손이 있고
그 손 속에
들녘으로 나가는 어머니
호미자루가 쥐어져 있다.
꺾인 자리를 지우며 푸른 하늘을 향해
날개 펴는 새순 속에는 또
얘야, 손발이 부르트도록 땅을 뒤져 네게 올려주마 하시던
고무신발 같은 말씀이 달리고 있고
주렁주렁 열매 달린 묵은 순 속에는
딱딱한 매듭으로 남거나 삭정이로 부러지는
줄기의 마지막 모습이
아프게 숨어 있다.

땅을 기어가는 것들,
절벽을 기어오르는 줄기들에는
어둔 싹들을 이 세상으로 업어낸
아름다운 등이 있다. (김영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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