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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초록 우엉차 / 이미영

부흐고비 2019. 11. 28. 08:24

초록 우엉차 / 이미영


때 없이 우엉차를 마신다. 이러다가 몸에서 구수한 숭늉 냄새가 나게 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누가 땅속으로 기다랗게 뿌리를 내리는 이 식물에게 우엉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을까.‘우엉’하고 소리를 내보면 동그랗게 모아진 ‘우’를 따라 ‘우엉’이 저절로 벌어져 나온다. 순하고 편안한 발음이다. 이름을 닮아 성질도 순한 차가 되었다. 삼주쯤 전에 시댁에 갔더니 어머니는 손수 만든 우엉차라고 한 잔 내주었다. 티백에 담긴 제품과는 달리 정갈한 맛이 우러났다. 하얀 컵 안을 들여다보니 검은 빛이 도는 초록이 찰랑거렸다. 내가 아는 우엉차는 투명한 갈색인데 암녹색이라니 신기해서 한모금 마실 때마다 들여다보았다. 어디에서 풀잎색이 나왔을까. 정작 우엉을 찌고 볶아 만든 어머니는 구수한 맛밖에 즐길 수 없었다.

어머니가 눈 수술을 하는 날이었다. 백내장과 노안 교정 수술을 한꺼번에 하기로 했다. 무섭다고 미루고 행여나 저절로 좋아질지도 모른다고 아이처럼 고집했다. 어렵사리 결심을 하고 수술 날짜를 잡고서도 마음은 오락가락했다. 우엉차를 건네는 그 순간에도 이제라도 그만둘까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수술이라는 말만으로도 속이 쪼그라드는데 눈에 레이저를 쏘고 허옇게 된 부분을 제거하고 나서 렌즈를 삽입한단다. 아무리 간단한 수술이라고 설명해도 두려움이 밀려 올 것은 이해할 만했다. 그런데 눈이 밝아져서 지저분한 집안을 보게 되면 며느리에게 부끄러워서 어쩌나 하는 걱정을 되뇔 때에는 고개를 끄덕일 수가 없었다. 정작 며느리인 나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는 일로 자신을 괴롭혔기 때문이다.

수술은 의사의 말처럼 간단하게 끝이 났다. 회복실에서 30분 이상 안정을 취하고 돌아가라는 지시대로 조용히 곁을 지켰다. 긴장이 풀리고 마음이 홀가분해져서인지 전에 없던 말씀을 길게 늘어놓았다. ‘네가 곁에 있어서 다행이다, 와줘서 고맙다, 번거롭게 해서 미안하다’를 반복했다. 회복실 작은 의자에 쭈그리고 앉아 별일 아니라는 말과 금방 환하게 보게 될 거라는 응원을 섞어 한참 말동무를 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쉬기를 권했는데 어머니는 오히려 말씀으로 쌓였던 긴장을 풀어내는 중이었다. 댁으로 모셔 드리고 돌아오는 내 손에 직접 만든 우엉차 전부를 쥐어주셨다. 한쪽 눈에 안대를 하고 엉거주춤 다니는 걸음걸이가 안쓰러워 깊은 포옹으로 위로를 보냈다. 여든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병원 길 동행이 처음은 아니다. 다리며 허리며 치아까지 병원 순례에는 늘 옆자리를 지켜왔다. 다리를 절뚝거릴 때에도 부축받기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허리통증으로 병원 신세를 질 때조차도 도움 손을 마다했었다. 이번 병원 길 만큼은 다르게 다가온 모양이다. 앞이 캄캄할 거라는 막연한 불안감이 나에게 의지하게 만들었나보다.

부축과 도움 손을 밀어낼 때마다 거부당하는 느낌이 일어났다. 내 보살핌은 받고 싶지 않다는 무언의 표시 같아 서운했다. 그런데 어머니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눈 수술의 두려움만큼이나 자신의 치부를 밝아진 눈으로 확인할 것이 걱정이었다. 말끔하지 못한 가스레인지와 때 묻은 그릇 엉덩이를 볼 일이 부끄럽다고 거듭 말했다. 나는 염두에 둔 적이 없는 일이 당신에게는 부담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마찬가지였겠구나. 아픈 다리와 허리를 맡기기 싫기보다 건강하게 홀로 서지 못하는 자신이 못마땅했던가 보다. 아마도 숨겨둔 본심은 자식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고 쇠잔한 몸이나마 혼자 힘으로 곧추세우려는 뜻이었을 것이다.

우엉 뿌리의 껍질을 벗겨내면 하얀 속살이 서서히 갈변하는 사이로 풀색이 어른거린다. 하얗던 몸통이 잘게 썰려 불에 시달리고 나면 누렇게 변한다. 어머니의 우엉차는 뜨거운 물로 한번 우려내면 구수한 숭늉 맛을 풍기며 투명한 갈색을 띤다. 찌고 볶은 정성이 아쉬워 잔에 담긴 우엉 조각을 주전자에 넣고 한소끔 끓였더니 초록색이 올라왔다. 이때부터는 볶아서 새로 생긴 구수한 맛은 옅어지고 뿌리가 원래 가지고 있던 풍미가 입안에 가득해진다. 불기운에 그슬려 갈색 뒤에 숨어있던 풀빛도 맛을 따라 고개를 드는가 보다. 어머니 표 우엉차를 마신 다음부터 우엉차는 갈색이 아니라 초록이 되었다. 속맛을 느끼려면 음미해야 하듯이 본심은 자세히 들여다봐야 알게 되는 이치인가 보다. 나는 잘 우려낸 초록 우엉차를 마시며 몸 안의 찌꺼기를 내보낸다. 껄끄럽게 붙어있던 묵은 감정들도 한 모금 두 모금 차를 따라 떠내려간다. ‘우엉’처럼 순하고 편안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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