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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돌이 기도한다 / 이미영

부흐고비 2019. 11. 28. 08:26

돌이 기도한다 / 이미영


돌은 살아있는 게 분명하다. 산꼭대기에 우뚝한 바위로 하늘을 향해 머리를 치켜들고 살았었다. 바람에 깎이고 비에 살점이 뜯겨나가 주목의 헐거운 이파리로 이불을 덮고 숨어 지내기도 하다가 조금씩 아랫동네로 떠밀렸다. 큰 바람이 만든 급물살을 타고 허우적거리다가 비바람에 구르다가 닳고 닳아져 산 아래에 모여 들었다. 설악산에서 나고 자란 돌멩이들이 허옇게 늙어 백담사 앞 계곡에 엎드려있다. 누구하나 모나지 않고 동글동글 납작한 자갈이 되어 다시 만났다.

까막딱따구리가 나무를 쪼는 둔탁한 소리를 법고로 믿으며 묵언으로 수행했을 것이다. 새하얀 빛을 뿜으며 기세등등하던 화강암 바위가 허연 돌멩이로 변해 잘팍한 계곡에서 굴러다니자면 여간한 수행이 아니고서는 견디기 어려웠을 일이다. 사람들은 어찌 이들의 사연을 알았는지 백담사 앞 돌멩이 계곡을 거대한 돌탑의 광장으로 만들어 놓았다. 아니다, 오만가지 곡절을 가진 중생들이 오가며 시름을 쌓았다가 근심을 풀어놓고 떠난 것일 게다. 쉽게 움직이지 않을 듬직한 돌덩이 위에 상념 하나를 올려놓고 또 작은 돌을 쌓으며 치성을 드렸다. 그러다가 큰물이 질 때면 자신들의 걱정거리도 다 씻겨 가기를 바랐을 일이다. 물살이 미치지 않을 곳에 정성스레 소원을 쌓아올리며 오래도록 무너지지 않기를 정성으로 다졌던 이도 있을 것이다. 구름을 끼고 신선과 노닐었던 바위가 묵언수행을 거쳐 낮은 곳에 이르렀는데 어찌 범부의 가슴앓이를 풀어주지 못할까.

오세암으로 가는 길은 백담사를 거쳤다. 빽빽한 나무를 울타리로 둘러친 불전각이 어른거리면 세찬 물소리가 먼저 귀를 정화시켰다. 옆 사람의 말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울어대는 계곡물 소리와 암록색 수풀사이로 눈부신 돌탑들의 장관이 드러났다. 천개의 탑을 쌓으면 해탈한다는 이치를 누가 알려주었는지 돌은 수천 개의 탑이 되고 있었다. 백담사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산골짜기에 갑자기 나타난 돌탑의 무리는 시야를 압도하였다. 천불동은 들어봤어도 천탑동을 마주하기는 처음이었다. 나는 누구의 허락도 없이 천탑동이라 이름 붙였다. 수많은 탑 사이를 지나던 이들은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물에 씻겨간 돌멩이를 또 새로이 쌓고 올렸다. 끝이 안 보이는 돌 무리를 짖어대는 계곡의 물소리가 엄호했다.

오세암은 설악산의 가장 깊은 곳에 숨어있지 싶었다. 가도 가도 줄어들지 않는 거리는 숨이 멎을 듯 가쁘게 만들었다. 천탑동에서 한참 멀어진 다음에도 작은 돌을 쌓은 무더기는 계속 나타났다. 다리는 말을 듣지 않고 팔을 내밀 기운도 사라져갔다. 혼자 몸 하나 섰을 등산로에 기대어 정신을 추스르는데 꼬마 돌탑이 눈에 들어왔다. 오래 전 이 길을 지났을 누군가는 잠시 숨을 고르는 순간에도 부스러기를 모아 부처님께 간청을 올렸겠지. 마애불의 입이었을 지도 모르는 조각돌은 그의 정성을 들으시라고 소리 없이 외쳤을 것이다.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탑은 인도에서는 벽돌을 구워 쌓아 올렸고 중국과 일본에서는 나무로 만들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돌을 깎아 탑을 지었는데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양식이다. 불에 타지도 않고 벽돌처럼 빠지는 일도 없으니 영원한 부처님께 기원을 올리기는 그저 그만인 소재이다. 암자를 올랐던 이는 석공이 정으로 쪼고 다듬어 불당 앞에 세우는 형상은 아니라도 영원성을 가졌다고 믿는 돌 한 조각에 소망을 쌓아보고 싶었던 걸까.

오세암으로 가는 길은 좁고 험했지만 조각 돌탑으로 정성을 올리는 장삼이사의 바람을 보며 힘을 낼 수 있었다. 불심을 모르는 이에게 전해지는 불공의 흔적들이 삶의 무게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나는 그저 산을 올랐을 뿐인데 인생으로 다가왔다. 오세암에 도착해서도 대청봉을 바라보며 급하게 정상을 정복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암자의 한 귀퉁이에서 반찬이 뒤섞인 도시락을 먹었다. 그리고 멍하니 바라보다 깊은 산사이로 드러난 하얀 바위가 근육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금세 무너질 줄 알면서도 또 쌓는 일은 어리석은 짓이 아니었다. 뒤따라오는 이가 다시 집어 올리게 하고 이를 보며 무작정 꼭대기에 오르겠다는 허욕보다는 자신을 생각하게 만들었으니.

예전에 엄마도 정성으로 탑을 쌓았다. 높은 곳에 앉으신 분을 향해 가지런히 손을 모았다. 기도가 무슨 효험이 있냐고 논리적으로 따져 물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마음가짐이 다 좋게 바꾸는 힘이 있다고 할 뿐이었다. 바위는 다 들었을 것이다. 그 바위는 마애불이 되기도 하고 삼층 석탑이 되기도 했겠다. 부처이기도 하고 탑이기도 했던 조각돌은 수없이 들었던 간구를 알갱이마다 품었다. 위용을 자랑하던 암석에서 씻기고 잘려나가 소망을 안은 돌멩이로 승화되었을 것이다.

눈을 감고 백담사 천탑동을 본다. 눈이 부시다. 깨끗한 염원으로 반짝인다. 귓가가 쟁쟁하다. 계곡의 물소리가 그리도 요란한 것은 돌탑들의 기도 소리가 흐르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가고 또 온다. 기도는 경전이 되어 돌마다 새겨지고 계곡은 염불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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