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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싱구라미 / 권현옥
영화 「쉬리」의 열풍은 대단했다. 영화 한 편이 우리의 마음을 엑스레이처럼 투시하고 지나가면 투명하게 여과된 이미지를 남긴다.
‘쉬리’와 ‘키싱구라미’ 두 마리의 물고기가 내 손안에 잡힌다. 쉬리는 일급수에만 사는 천연기념물이며, 키싱구라미는 같은 종끼리 자주 키스하며 한 마리가 죽으면 다른 한 마리도 따라 죽는 물고기다.
얼마 전, 삼풍 사고로 부인과 딸을 잃은 중년의 남자가 5년이 지난 지금, 그 위령탑을 지켜보던 소나무에 목을 매어 목숨을 끊었다는 뉴스에 가슴이 철렁했다. 거실을 닦고 있던 걸레로 눈물을 지우며 반복적인 헛손질만 해댔다.
절망에는 두 가지가 있다. 정신적 절망과 육체적 절망이다. 정신적 절망으로 죽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고, 육체적 절망 속에서 살고 싶은 욕망이 강렬해도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 있다. 정신적 절망이 자신이 만든 함정이라면 육체적 절망은 죽음과 가까이 있다. 절망이란, 극한 상황에 직면하고 자신의 유한성과 허무성을 깨달았을 때 느낀다고 한다. 정신적 절망은 자신과의 처절한 싸움으로 영혼이 만신창이가 되어도 한 가닥 소망이 있으면 그 구렁에서 나올 수 있다. 육체적 절망은 그냥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으며 마침내는 정신적 절망을 동반한다.
20년 전, 인연의 끄나풀 하나 없는 거제도에서 산 적이 있다. 신혼의 즐거움보다는 나 자신을 가두어 두었던 시절이었다. 현실에 힘없이 초라해지고 해방되지 않는 자존심 때문에 거제도의 아름다운 원시성을 즐기기에는 생활이 강퍅했다. 사랑 하나로, 자유롭지 않고 외곬로만 가던 자아를 진정시키고 살았다.
그나마 멋지게 살아 보자고 주말마다 산을 넘은 것은 낚시 때문이다. 낚시를 하는 여유와 짜릿함은 흥분제와 진정제의 역할을 했다.
남편과 세 살 된 딸과 바다로 갔다. 5개월 된 태아도 함께 했다. 멀리 보면 망망대해며, 밑으로는 낭떠러지고, 위로 보면 기암절벽인 곳에서 신혼의 릴낚시와 대낚시를 즐겼다.
남편은 낚시가 잘 되지 않는다고 물속으로 들어가겠다고 했다. 수영을 못하는 남편이기에 얕은 물에서 더위만 식히리라 생각되어 한마디 거들었다.
“누구 과부 만들려고 그래, 수영도 못하면서 어딜 들어가, 들어가지마.”
내 말이 바닷물에 채 닿기도 전에 목젖을 누르며 간신히 터져 나오는 외침이 있었다. 남편은 파도에 쓸려 큰 바위 밑에서 허우적거렸다.
“권현옥씨, 권현옥씨…….”
그의 머리가 물속에서 물 밖으로 오르락 거릴 때 부르는 내 이름 석자다.
그 자리에서 나는 그의 죽음을 보고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순간, 내가 걱정한 것은 그 순간의 사실뿐만 아니라 미래였다.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사실과 가슴에 탁본이 돼 버린 장면을 품고 살아갈 세월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세 살 된 딸은 넓적한 바위 위에 세워 두었다. 누가 데려가리라. 나는 수영을 조금은 할 줄 알았기에 멀찌감치 떠있던 스치로폼을 잡아서 그에게 주고, 수영을 해서 나올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신발은 거추장스러울 것 같아 바위에 나란히 벗어 놓았다. 하나의 의식과도 같았던 그 행위는, 사랑으로 무장된 어리석은 용기였다. 스티로폼은 튕겨 나갔고 긴 머리카락은 나의 안면에 달라붙어 앞이 보이지 않았다. 바다 속은 죽음의 동굴처럼 어둑하여 공포에 질리게 하였다. 너무나 많은 물에, 그 위력에 기가 죽고 말았다.
남편은 힘이 남아있는지 나의 발을 붙들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본능적으로 뿌리쳤지만 절망에 빠졌다. 그 뒤론 수영은 되지 않고 허우적거리며 죽음을 예감했다.
절망이란, 논리적이고 여유 있는 것이 아니다. 어쩔 수 없는, 정말 어쩔 수 없는 굴복이었다. 의식은 선명해지고 투명해졌다. 죽음이란 이렇게 단순하고 순간적이며 쉬운 것인가. 남은 가족의 슬픔은 클 것이고 그 뒤풀이는 풀어도 풀리지 않는 한의 동아줄이 될 것이라는 생각까지 떠올랐다.
“6년의 긴 연애와 결혼, 그리고 겨우 3년을 살고 그 먼 거제도의 바다에서 죽었구나.”
통곡하는 가족들의 얼굴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불과 몇 분이 지났을까. 멀리 있던 낚시꾼들이 몰려와 긴 낚싯대를 드리웠을 때, 나는 삶의 몸부림으로 허우적거렸고 남편은 등을 보이며 떠 있었다. 남편은 어깨에 닿은 낚시 끝을 느꼈는지 덥석 낚싯대를 잡았고, 늘어진 육신은 바위에 부딪혀 생채기를 내며 끌어올려졌고 그 다음 기다렸던 내가 끌어올려졌다.
죽음을 관리하는 신이 있다는 것인가 없다는 것인가. 정신을 차리고 난 뒤에는 아무 말도 입 밖에 내놓을 수가 없었다. 시퍼런 어둠의 공포처럼 세상도 무서웠다. 물이 그렇고, 산이 그렇고, 지나가야 했던 암자도, 눈부신 햇살도, 조용함도 그랬다.
그 날 밤, 한숨도 잘 수가 없었다. 방안에는 수족관이 있었다. 금붕어들이 자유롭게 지느러미를 움직여 물속을 헤엄쳐 다니는 광경은 도둑이 놓고 간 칼처럼 무서워서 정면으로 쳐다볼 수 없었다. 우리는 아침 햇살이 들어올 때까지 공포의 밤을 형광등의 차가운 불빛으로 대결해 가며 하얗게 새웠다.
그가 말했다.
“당신이 물속에 들어 왔을 때 나도 모르게 당신을 잡았다가 ‘아니야, 나 혼자 죽어야지’라고 생각하면서 손을 놓았어, 미안해.”
내가 말했다.
“당신이 내 발을 잡았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떼어놓으려고 안간힘을 다했어. 그 순간, 나부터 자유로워야 당신도 구할 수 있다는 의식이 있었어.”
우리는 부둥켜안고 엉엉 울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그때의 절망했던 순간을 되새김질하면 몸서리쳐진다.
그 후로 나는 한 번도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일이 없다. 나의 판단력의 옳고 그름은 생각하고 싶지 않다. 다만 사랑하는 사람이 내 눈앞에서 죽어가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을 뿐이었다. ‘혼자 사느니 해보는 데까지 해보고 안 되면 같이 죽는 게 낫겠다.’는 것이 그 시기에 내가 판단한 무모한 결론이었다. 사랑이 뜨거워서 그랬다고 생각하겠지만, 이면에는 나만의 이기심 때문이라는 사실을 실토하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으리라.
녹 그릇에 녹청이 끼듯, 사랑이 희미해져 생활이 재미없게 느껴질 때가 있다. 마음속에 있는 상처를 보듬고 어루만져 광택제로 만들었다. 반대의 의미로 가치를 되찾아 보는 일이다.
“이 사람이 내 곁에 없다면.”
남편이 곁에 있어도 반대의 의미는 눈물 난다.
삼풍 사고를 겪은 남자는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절망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쳤을까. 절망의 늪을 빠져 나오지 못하고 죽음을 택한 외로운 분에게 애도를 표한다. 그 죽음이 옳지 않다는 것은 알지만.
이제 내 마음속 상처의 웅덩이에 가두어 두었던 한 쌍의 키싱구라미를 맑은 하천에 놓아준다. 언젠가 그리움으로, 맑은 하천에서 키싱구라미를 만날 수 있다면, 따라 죽는 키싱구라미의 모습이 아니라 키스하는 키싱구라미의 모습이길 꿈꿔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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