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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장 여사님 파이팅 / 권현옥

부흐고비 2019. 12. 3. 08:39

장 여사님 파이팅 / 권현옥


장 여사님은 아침에도 바쁘다.

그제도 어제도 바빴다. 그리고 내일도 바쁘길 바라며, 오늘 아침 바쁘다. 서방님이 스스로 바쁘지 않게 살고부터 장 여사는 바쁜 일이 생기기 시작했다.

정성껏 아침밥 차려놓고 둘이 앉아 쓱쓱 입맛 좋게 먹고 난 뒤 빠른 손놀림으로 설거지를 해치우고 운동복으로 갈아입는다. ‘다녀올게요.’라는 말을 등 뒤로 밀고, 되돌아오는 잔소리가 다시 등을 찌르든 말든 오래된 철 대문을 열고 큰길가 오거리로 냅다 걸어간다. 발걸음은 급하지만 배짱이 조금 붙은 걸음이다. 시댁에서 일하다 와도 늦었다고 욕을 먹고 외출로 조금만 늦어도 지청구를 먹으면서 살았던 지난 세월이었다. 이제는 두려운 걸음이 아니다. 처음 시작한 몇 년은 욕을 먹긴 했다. 장 여사가 동네 배드민턴 팀에 합류하고부터 10년이 넘도록 다니고 있으니 세상도 바뀌고 서방님도 세상 끝자락 억지로 잡고 수굿해진 감이 없지 않았다. 사람과 매끄럽지 못한 서방님과는 반대로 장 여사는 인정 많고 매너 좋고 솜씨 있어 밖에만 나가면 칭찬을 받았다.

오거리에 잠시 서 있자니 시간도 정확하게 차가 섰고 “아이구 형님 어서 타시요”라는 아우들의 인사와 함께 인근 산 숲으로 향한다. 코트에 도착하면 그 어떤 세월도 어떤 기억도 어떤 관계도 없이 파트너와 마주보고, 코트에 우뚝 혼자 서는 것이다. 셔틀콕을 보고 상대를 보고, 하늘을 향해 땅을 향해 고개를 움직이고, 셔틀콕을 향해 허공을 향해 팔을 휘두를 때 가슴도 실컷 돌아다녔던 것이다. 가슴을 펼 때 어느 하나 서방님에게 얽매인 게 없어졌다. 휘두르고 휘두른다. 허공을 가르고 날아오는 작은 한 점을 잡아 방향을 되돌려 놓고, 다시 날아오면 다시 멀리 보내고, 그리고 얼굴이 환해져 들어왔다.

서울도 가고 부산도 가고 연령대별 배드민턴 선수 생활을 하며 날로날로 건강해졌다. 콕이 깃을 달고 날아가듯 살아온 무게가 깃을 단 듯 달아났고 기억나는 세월들은 견딜 만했다. 지난날 한 달 넘게 중환자실에서 의식불명상태로 누워있던 의료사고 후유증도 다 물리쳤고 IMF 때 파산을 맞은 아들이 준 마음의 피멍과 몇 년 전 막내딸을 가슴에 묻은 슬픔도 떼를 입혀가며 다독였다.

그래, 세상은 이렇게 뭔가를 주고받고, 치고받고, 넘기고 받고, 때리고 받고, 놓치고 줍고, 또 줍고, 잰 걸음으로 뛰고, 그리고 땀 흘리고 난 뒤 악수하는 것인데 죽자 살자 지청구만 듣고 산 세월, 기가 센 서방 만난 죄로 집안 조용하자고, 애들 이불 속에서 속상한 울음 흘리지 말라고, 참기만 하다 타내려간 가슴이었다. 70이 넘어서야 운동을 하며 답답한 가슴을 연 것이다.

라켓을 실컷 휘두르고 나면 땀이 한 말이고 웃음이 두 말이고 상쾌함이 서 말이다. 서방이 저세상으로 떠났거나 집에 있거나 간에 자유로운 형님 아우들은 칼국수를 사먹으러 가거나 가져온 된장과 상추에 이승의 즐거움을 싸먹으며 땀을 식히지만 장 여사는 또 바쁘다.

장 여사님은 점심때도 바쁘다. 총총 산을 내려와 택시를 타고 대문을 열고 부엌으로 달려간다. 창고 위 흙을 퍼 올려 가꾼 텃밭에서 상추를 뜯어오고 밑반찬을 내고 비린 거 없으면 밥상이 아닌 줄 아는 서방님 비위를 맞추기 위해 해동된 생선을 굽고 예닐곱 가지의 반찬을 주르륵 늘어놓는다. 입맛이 없다면서 잘 먹는 서방님 얼굴을 보면 웃음이 나올 때도 있다. 가끔은 ‘성질 사나운 서방이라도 있어주니 든든한 건가?’ 하며….

60년이 넘도록 차려온 밥상, 언제나 정성스러웠다. “저리 고약한 서방님 식사를 푸짐하게도 바치네” 하곤 딸들은 눈을 흘겼지만 장 여사에 대한 존경이 깊어갔다. 음식 만드는 걸 좋아했고 솜씨가 좋기에 다행이었다. 젊어서 그리 건강한 편이 아니었는데 어디서 늘그막에 저리 활력이 솟아나는지 부엌일도 뚝딱 해놓고는 나갈 채비를 한다.

장 여사님은 오후에도 바쁘다.

“OO엄마, 뭐혀, 빨리 오잖고.”

핸드폰 밖으로 흘러나온 소리는 노인 문화센터에서 기다리는 탁구팀이다. 서방님이 수십 개의 케이블 TV 채널을 외우고 있을 때 장 여사는 스마트폰 사용법을 외워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여자도 남자와 똑같이, 꼭 배워야한다”며 한 맺힌 교훈으로 딸년들 키워놓았던 장 여사인지라 복지센터에서 하는 노래교실이나 강연도 들으며 젊은 할머니로 살고 있다. 오른 팔과 고개와 몸통을 한 방향으로 같이 돌리며 치는 게 탁구인데 “노인들의 폼은 기막히게 창조적이다”라며 장 여사는 웃는다. 그래도 당신은 가르쳐 준 대로 배워 예쁘단다. 이기려고 삐딱하게 공을 날리지 않고 상대방이 잘 받게 공을 친단다. 믿을만한 말이다.

장 여사님은 저녁에도 바쁘다. 저녁을 준비하며 몸에 좋다는 약초를 달여 놓고 텃밭에서 연하디 연한 열무를 뜯어 물김치를 담그고 작은 깻잎 하나하나를 양념장에 적셔놓고 김치냉장고에 넣으니 흐뭇하다. 할 일을 다 했으니 씻고 누우면 잠이 안 와 죽겠다는 서방님을 옆에 두고 코를 골고 깊은 잠을 잔다. 술 먹은 서방님을 기다리며 가슴 조이고 잠 못 자고 가슴 치며 참아냈던 수십 년의 울혈이 스르르 녹아내리는 잠이다. 스르르 스르르.

장 여사님은 내일도 바쁘니까 바쁘게 잠이 들었다.

장 여사님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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