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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항아리 / 조현미

부흐고비 2019. 12. 5. 15:32

항아리 / 조현미1
제6회 2014 천강문학상 대상


소나기가 그었다. 빗물이 일필휘지한 뒤란 풍경은 동적動的이다. 옥수수 잎이, 호박 넝쿨이, 흰 보라 도라지꽃이 빗물체로 살아 꿈틀거린다. 갓 목욕을 마친 장독들의 때깔도 육덕지다. 반지레하지만 두루뭉술한 태가 꼭 촌부의 뒷모습 같아 관능과는 멀면서도 볼수록 정이 간다.

나란히 어깨를 겯고 있는 항아리들을 보니​ 슬며시 웃음이 난다. 아가리가 좁고 배는 불룩한 데다 굽도 없는 항아리들이 구석기시대의 유물인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를 꼭 닮은 탓이다. 얼굴의 윤곽은 철저하게 무시한 반면 가슴과 배, 엉덩이는 지나칠 정도로 풍만한 조각상은 다산과 풍요의 상징이란다. 크기에 관계없이 펑퍼짐한 복부가 영락없는 여성상의 추상이다. 당시의 크로마뇽인들에게나 현대인들에게나 항아리 형태의 몸매는 다산의 기원을 넘어 어쩌면 신앙 차원인지도 모르겠다.

신혼 적, 시댁을 찾는 일은 어려운 이의 집알이를 하듯 번거롭고 불편했었다. ​식구들의 워낙 많기도 하려니와 데면데면한 시어머니 탓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게 사람 사이를 가르는 침묵이라는 것을 그때 절감했다. 안절부절 겉도는 나를 마치 오래 써 온 세간처럼 여기는 남편 또한 낯설었다. 그의 말마따나 일 년에 고작 네댓 차례가 아니겠는가. 때마다 스스로를 담금질했지만 하소연할 친정조차 없는 마음은 늘 도린곁을 맴돌았다.

이방인처럼 외도는 내게 그나마 곁을 내 준 건 뒤란이었다. 군데군데 돌을 박은 토담이 둥글게 안고 있는 뒤란은 제법 널찍하고 아늑했다. 툇마루에 앉아 아가리도, 몸뚱이도, 귀때도, 어감까지도 동글동글한 항아리들을 보면 날 서있던 가슴 언저리가 절로 유연해졌다. 야트막한 토담 너머로 보이는 하늘과 모로 누운 능선, 부리부리한 눈망울을 가진 참나무들,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옹기들, 키 순서대로 늘어선 채송화와 맨드라미, 해바라기가 한 채의 집을 불러왔다. 오래 전 지상을 떠난, 작고 누추했지만 사철 온기가 끊이지 않았던 나의 옛집이 그렇게 되살아왔다.

옹기가 오지그릇과 질그릇을 아울러 일컫는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질흙을 비교적 낮은 온도에 맨몸뚱이로 구워낸 것이 질그릇이고, 잿물을 입혀 구워낸 쪽이 오지그릇이란 것은 덤으로 얻은 수확이다. 뿐일까. 장독대에 즐비한 옹기 또한 용도와 모양새에 따라 제각각 다른 이름을 갖고 있었다. 아래위가 좁고 배가 불룩해 주로 장류를 저장하거나 곡식을 담는데 쓰이는 항아리, 시누이들처럼 엇비슷한 외모의 소래기와 버치, 자배기, 궁굴게 생긴 두멍과 방구리, 두루미처럼 길쭉한 아가리를 쭉 빼고 있는 식초 항아리며 이름조차 생소한 중두리와 바탱이…….

동서들이 곰살궂게 설명을 해 줬지만 옹기 일가와 친해지는 건 서른 명 남짓한 조카들 이름을 외는 것만큼이나 버거운 일이었다. 질박하면서도 소소했으나 거뜬히 식구들의 사철 밥상을 바라지해줬던 옛집의 장독대가 자꾸만 오버랩 되었다.

옛집의 장독대는 볕바른 자리에 있었다. 그곳은 햇살의 놀이터이자 냄새들의 천국이었다. 고춧가루와 엿기름, 찹쌀가루, 메주가 바다에서 시집 온 소금과 합방해서 시나브로 익어갔다. 햇볕과 바람, 시간이 숙성시킨 장맛은 재료가 여럿이되 겉돌지 않고 그윽했다.

유년의 봄은 장독대로부터 시작되었다. 햇살이 꼼지락꼼지락 돋을 무렵, 이가 빠진 사발에 양껏 모래 밥을 퍼 담고, 진달래꽃잎을 찧어 고추장을 담그고, 연둣빛 머위 잎으론 김치도 담갔다.

"에구 이 방구리들아, 기어이 사달을 낼라."

할머닌 잔소리가 여간 아니었지만 당신의 발소리가 삽짝을 나서기도 전 장독대로 모여들곤 했다. 토란잎 널따란 우산 아래서, 궂은비에도 젖지 않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땐 키가 간장항아리만큼 자라 있었다.

옹기의 값어치는 내용물의 양에 따라 결정되었다. 키가 훤칠한 옹기가 갓 조림造林된 나무처럼 즐비한 집들은 한결같이 행세깨나 하던 집안이었다. 장독대야말로 그 집안의 재력을 증명하는 공간이자 안주인의 자존심이기도 했다.

옛집의 장독대는 단출했다. 묵향을 잊은 벼루가 여럿, 장독대와 마당 어름에 놓여 있는 게 여느 집과 달랐을 뿐, 누대에 걸쳐 훈장으로 업을 삼았던 가계였다. 강미講米2로 쌀 한 말을 받든 한 되를 받든, 배우러 온 사람을 내치지 말라는 가훈은 그럴싸했다. 반면 아녀자들에겐 모진 삶의 멍에로 되물림되었다. 가뭇없이 이상한 추구하던 아버지가 질화로 곁을 떠난 후, 어머니의 삶은 더 팍팍해졌다. 가장 먼저 하루를 열고 밤이 이울도록 삶의 물꼬를 트러 바동거렸으나 대물림된 가난을 벗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래도 어머닌 사명처럼 장독간 둘레에 꽃을 심었고 몇 안 되는 항아리를 부지런히 닦았다. 차 있는 날보다 비어있는 날이 더 많았던 곳간에 비하면 장독의 인심은 그나마 푼푼했다. 어쩌면 당신은 헛헛한 속을 그렇게나마 채우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옛집을 떠나오던 날, 장독대부터 오래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러나 그 많은 추억들을 싣기에 일 톤 트럭은 너무 좁았다. 그렁그렁 빗물 담은 항아리의 눈매가 둠벙처럼 깊었다. 허옇게 곰팡이 난을 치는 벼루들의 핼쑥한 낯이 빈집처럼 쓸쓸했다.

나이 한 살씩 생애에 얹으면서 어머니의 장독대엔 빈 독들이 늘어 간다. 당신의 존재를 한층 윤이 나게 지탱하던 옹기들은 빈 하늘을 담고 있거나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있다. 시판용 된장에 익숙했던 혀끝이 점차 시댁의 장맛에 길드는 동안 당신의 등도 수북해졌다. 그럼에도 어머닌 매해 본능처럼 장을 담근다. 열한 가족을 먹여 살리는 손맛이 아직도 항아리마다 그득하다. 열다섯 살에 시집와 여든셋에 이르기까지, 어쩌면 뒤란에서 혼자 운 날도 수두룩할 것이다. 모진 불꽃을 온몸으로 받아 내며 그렇게, 어머닌 조금씩 단단해졌으리라. 가마 솥 같은 반세기가 어머니로 하여금 맛깔스럽게 말을 빚는 법을 잊게 한 건지도 모른다.

어머니에게도 나는 질그릇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나이 마흔에 얻은 막내가 자기瓷器처럼 섬세한 색시를 얻길 바랐으나 우여곡절 끝에 들어온 며느리는 도기陶器처럼 투박했다. 동서들 사이에선 홈홈하다가도 당신 앞에선 꼬막처럼 입을 다물었다. 더러 한 줌 햇살이나 바람을 기대했으나 마음 어귀에 비밀번호를 설정해 두고 출입을 제한했다.

세상은 모든 꽃들은 이울고 나서야 단단해진다. 여자를 벗고 얻은 어머니란 이름은 몸도, 마음까지 둥글게 했다. 당신의 어투는 여전히 테석테석하지만 말씀의 이면에 숨은 참뜻을 마음이 먼저 마중하기에 이르렀다. 고부간에 발효가 진행되는 동안 무수한 날들이 피었다 이울었고, 꽤 여러 번 항아리 속의 주인도 바뀌었다. 애초 마음 어귀에 금줄을 친 장본인이 나였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그토록 멀고 컸던 '시'자와 '친정'의 간격으로부터 어머니를 읽었을 땐 당신 또한 장독대와 더불어 쇠락의 길에 접어든 무렵이었다.

한 줌의 흙이 불을 만나 항아리가 되기까지의 과정 또한 산고産苦나 매한가지였으리라. 그 오랜 인고의 시간이 여자로서의 숙명이었다면 철철이 장을 담그고 발효시켜 숙성에 이르기까지 겪은 진통은 어머니로서의 삶이었으리라.

손끝이 야물지 못하다 지청구를 하시면서도 넘치도록 장을 담아 주시는 어머니, 쪼그려 앉은 뒷모습에 항아리가 우련하다. 장醬이든 사랑이든, 비우기 무섭게 채워지는 점에 있어서 항아리와 어머니의 속성은 유사하다. 여느 때와는 달리 목소리에 잔뜩 힘이 든 당신, 장독대와 함께할 때 어머니의 자존심은 빛을 발한다. 한 고비씩, 어머니가 끌어안았던 시간들을 접하며 아직은 설익고 옹색한 나도 조금씩 깊어지리라. 세상의 모든 것들을 둥글게 안아 주는 항아리의 바탕을 조금씩 닮아 가리라. 아주 오래 전, 내 어머니가, 어머니의 어머니가 그러했듯.

말끔히 목욕을 마친 장독대는 도량처럼 정靜하다. 경건한 풍경의 한가운데 발렌도르프의 비너스가 오밀조밀 사대四代를 위시하듯 앉아 있다. 태고부터 대물림된 조각상의 무표정이 그제야 활짝 웃는 듯하다.

수 세기 동안 대가족을 먹여 살렸으니 이만한 보시가 또 있을까. 동글동글 웃고 있는 항아리들이 내 눈엔 다 보살 같다. 덜어도, 덜어도 즉시 채워지는, 어머니들 가슴안에 화수분 하나 산다.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처소다.

  1. 조현미: 1971년 충남 청양 출생. 한국방송통신대학 국어국문학과 졸업(2012). 인천시민문예 신인문학상 대상(2001), CJ문학상 금상(2004), 경기도시공사 ‘경기사랑愛’ 대상(2008), ‘따뜻한 전파세상’ 금상(2009). [본문으로]
  2. 강미講米: 지난 날 글방 선생에게 보수로 돈 대신 바치던 곡식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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