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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각도를 풀다 / 이혜경

부흐고비 2019. 12. 6. 09:36

각도를 풀다 / 이혜경
제8회 2017 천강문학상 대상


그럴싸한 악기 하나쯤 배우고 싶다는 욕심을 기어이 행동으로 옮겼다. 야심차게 시작은 했지만 교습소 유리문을 열 때마다 손끝에 느껴지는 무게가 육중하기만 하다. 겨우 귀밑에 머리가 닿는 학생들 틈에 섞여 엉거주춤 플루트를 잡고 있노라면 괜스레 뒤통수가 가려운 기분이다.

콧대 높은 아가씨를 보는 듯 플루트의 첫 인상은 도도했다. 서늘한 은빛 광택에 주눅이 들어 얼룩이 남을까봐 악기에 손을 대는 일조차 조심스러웠다. 망설이는 마음에 긴장까지 보태어 시작도 전에 몸이 댕돌같이 굳었다. 선생님이 일러준 대로 입술을 최대한 오므리고 힘을 실어 보아도 정체 모를 바람 새는 소리만 되돌아올 뿐이었다.

첫소리가 나오기까지 여러 날 헤맸지만 한 번 소리가 만들어진 후로는 탄력을 받아 며칠 만에 저음 음역에 안착했다.​ 그런데 작은 언덕 하나를 넘으니 더 큰 산이 기다리고 있었다. 옥타브가 높은 고음 음역을 정복하는 과정은 된비알을 오르는 일이었다. 풍선을 불듯이 배에 숨을 몰아넣고 볼이 터지도록 입술에 단단히 힘을 주어 보았지만 번번이 고음 문턱에서 소리가 미끄러져 내렸다.

문제는 각도였다. 음의 높낮이가 달라질 때마다 입술 모양을 바꾸어 각도를 조절해야 하는데 저음을 익히면서 길들여진 입술의 모양과 각도가 몸에 배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초반에는 제대로 입술을 붙였다가도 마디가 넘어갈수록 모양이 흐트러지곤 했다. 각도를 벗어난 곳에 바람을 보내면 둥글게 모아져야 할 소리가 잘게 흩어져 깊은 울림이 없었다. 각도를 맞추느라 입술에 신경을 모으다보면 악기를 잡은 팔의 각도까지 무너져 제대로 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살짝 각도를 틀리는 주문이 내게는 무척 난이도가 높은 숙제였다. 지금껏 살아오는 동안 정해진 각도에서 벗어나 본 적 없어 더 그런가 싶었다. 여러 형제들의 틈바구니 사이에서 자란 터라 어릴 떄부터 위로도, 아래로도 마음껏 팔을 뻗을 수 없었다. 격동의 사춘기 시절조차 부모님 말씀에 반기를 들어본 기억이 별로 없다.

학교라는 울타리에서도 꼬박 십이 년 개근상을 탈 정도로 정해진 각도를 벗어나지 않았다. 미성년의 봉인이 해제된 대학 시절에도 필름이 끊길 정도로 취해본 적이 없었고, 그 흔한 배낭여행 한 번 다녀오지 않은 채로 졸업을 맞았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혼자 선을 긋고 일정한 각도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정해진 틀 안에서 화석처럼 굳어버렸다.

비교적 고요하게 지나갔던 사춘기가 중년의 나이에 다시 오려는지 언제나 똑같은 지점에 축을 끼우고 서 있는 내 모습을 새삼 돌아보게 되었다. 늘 같은 장소에서 익숙한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는 일이 목이 늘어난 티셔츠처럼 편하기만 했는데 불현듯 스스로가 초라하게 느껴졌다. 끼니마다 더운밥을 짓고 흠치르르하게 집을 닦으면서도 정작 가슴 안쪽에는 허기가 지고 묵은 먼지가 쌓여갔다.

얼굴에 드러나는 잡티는 화장으로 가릴 수나 있지만 내면에 번지는 잡티는 손 쓸 도리도 없이 점점 짙어질 뿐이었다. 잠시라도 일상의 테두리를 벗어나 새로운 경험을 해 보자고 스스로 처방을 내렸다. 오롯이 나만을 위해 지갑을 열고 악기를 배우는 것은 평소의 계산에서 한참 벗어나는 일이었다. ​하지만 계속 같은 자리에서 하나의 각도만 고집하다가는 틀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것 같아 용기를 냈다. 낯선 영역에서 새롭게 무언가를 배우면 예각으로만 살아온 삶의 반경이 둔각으로 넓어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나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일상의 각도를 넓히겠다는 거창한 포부를 안고 시작했지만 정작 입술 각도를 바꾸는 사소한 일조차 만만하지 않았다. 나이를 한 살씩 먹을수록 시간의 중력이 몇 곱절 세져서 새로운 쪽으로 방향을 바꾸려면 몇 배의 노력이 필요했다. 약점을 이기는 길은 연습밖에 없었다. 악기를 놓고 있을 때도 머릿속에 입술 모양을 그리며 부지런히 입술을 풀었다. 무작정 힘을 주기만 해도 안 되고 너무 느슨하게 풀어도 곤란하다. 고정되어 있는 입술 각도를 넓게 풀어야 제대로 된 소리를 만들 수 있다고 했다. 음계에 맞추어 다른 각도와 모양으로 입술을 바꾸어 연습한 끝에 몇 갈래로 흩어지고 미끄러지던 소리가 네 박자의 온음표를 지탱할 수 있게 되었다.

선생님 귀에도 옳은 소리로 들렸는지 다음 수업부터 연주곡으로 넘어가자고 했다. 그 곡을 연주하려면 저음과 고음을 수시로 넘나들어야 해서 입술 각도가 변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버틸 수 있는 뱃심도 필수다. 손가락 짚는 위치도 들쭉날쭉 바뀔 테니 또 하나의 고비를 맞은 셈이다. 장조가 바뀌고 박자가 불규칙한 곡을 만나 악보 위에서 수없이 엉덩방아를 찧을 내 모습이 훤히 그려져 슬며시 웃음이 났다.

새로운 악기 하나 배운다고 해서 삶의 반경이 갑자기 넓어지는 드라마 같은 일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플루트를 배우기 전이나 후나 여전히 같은 장소를 오가며 비슷한 리듬으로 지내고 있다. 다만 조금 달라진 점이 있다면 소리를 익히고 내 것으로 만들어 가는 소소한 재미를 깨달았다는 것이다.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 복잡한 음표를 내 것으로 만드는 과정은 단지 악기에 익숙해지는 일만은 아니었다. 작은 음표 하나도 쉬이 얻어지는 것이 아니어서 겨우 곡 하나를 익히고 한 계단 올라갔다 싶으면 더 높은 다음 계단이 기다리고 있었다. 곡의 분위기에 맞추어 박자를 밀고 당기면서 유연하게 리듬을 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힘들어서 그만두고 싶다가도 그 고비를 잘 넘기면 새로운 소리가 내 입술 끝에서 만들어졌다. 덤으로 성취감이라는 작은 선물도 따라왔다. 인생이라는 악보에서도 마찬가지다. 살다보면 잘 안다고 생각했던 지점에서 엉덩방아를 찧기도 하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폭풍우를 만나기도 한다. 예전에 대입 시험장에서 실수로 답안을 밀려서 쓰고​ 와서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밤새 울었다. 그때는 당장 내일이라도 인생이 끝날 듯이 눈앞이 캄캄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삶의 길목에는 시험 문제의 답을 제대로 쓰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었다. 크고 작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삶의 각도를 넓히다 보면 언젠가는 나만의 멋진 곡을 완성할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여러 언덕을 넘는 동안 배짱이 생겼는지 이제 낯선 악보 앞에서도 두렵지 않다. 예고 없이 올림표나 내림표 기호가 불쑥 튀어나와 발목을 잡아당기더라도 쉽게 흔들리지 않을 자신감이 생겼다. 눈과 입과 손이 각도를 조금 벗어나도 더 이상 부끄럽지 않다. 그렇게 흔들리고 미끄러지는 과정을 거치며 시나브로 곡이 자리를 잡아갈 것을 알기 때문이다.

수없이 넘어지고 일어서는 사이 각도가 조금씩 풀어진다면, 그래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악보 한 마디 만큼이라도 덜 넓어질 수 있다면 그깟 음 이탈쯤 무슨 대수이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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