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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삶 / 이명환

부흐고비 2019. 12. 12. 10:02

삶 / 이명환
The 수필, 2019 빛나는 수필가 60인 선정작


번뇌 많은 삶이다.
겪을 만큼 겪지 않고
번뇌를 넘는 방법은 없다.

이렇게 시작되는 19행으로 된 송운 성찬경(松韻 成贊慶)의 시 〈삶〉.

2014년 4월 ‘공간시낭독회’의 20여 명 시인들 앞에서 맨 처음 내가 암송暗誦한 시다. 여기 소속된 시인들이 남편 송운의 1주기週忌 행사에 와서 애도해 준 답례로 공들여 외워 보니 그냥 보고 읽던 때와는 그 맛이 아주 달랐다. 시인의 시심과 내가 혼연일체 되는 느낌이랄까.

‘공간 시낭독회’는 1979년 4월 9일에 한국의 큰 시인 구상(1919-1986) 선생이 박희진(1931-2014), 성찬경(1930-2013)에게 제안하셔서 발족한 우리나라 최초의 3인 시낭독회다. 건축가 김수근(1931-1986) 선생이 설계한 ‘공간空間’이라는 특이한 검은색 벽돌 건물 지하 소극장 공간사랑空間舍廊에서 처음 시작하면서 ‘공간시낭독회’라는 명칭이 붙었으니 어언 40년 동안이나 이어오고 있는 시 낭독 모임이다. 송운도 2013년 4월 공간시낭독회 400회 기념행사를 KBS 등 매스컴을 통해 홍보하겨고 애쓰던 중 2월 별안간 타계했다.

송운은 시 〈삶〉에서 이 생生을, 겪을 만큼 겪을 수밖에 없는 ‘번뇌 많은 삶’의 현장으로 봤다. 송운뿐만 아니라 석가모니께서도 이 속세를 고해苦海라 이르지 않았나. 그렇다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시점의 삶에서 나의 가장 큰 번뇌는 무엇인가? 내 안에 깊이 잠겨 무심해지려는 지향으로 나를 들여다본다.

달마대사의 제자 고승 혜가慧可가 맨 처음 스승께 법문法問할 때 “어찌 하면 번뇌 망상에서 초연해질 수 있겠습니까” 하니 “그 번뇌 망상을 여기 가져와 봐라.” 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전한다. 번뇌란 기실 실체가 없는 뜬구름과 같다는 가르침일 것이다.

다시 내 안을 곰곰이 살펴보니 바로 여기 번뇌의 덩어리가 보인다. 이것은 실체가 없는 뜬구름이 아니다. 내 평생 삶의 총체적 결과물이라 할 수 있는 보기에도 민망한 과체중 덩어리가 거기 있다. 혈관에 낀 기름때와 비계에 둘러싸인 이 몸뚱이가 나의 구체적인 번뇌의 실체임을 깨닫고 아연실색한다.

몇 년째 내게 똑같은 용량의 콜레스테롤 약을 처방해 주는 종합병원 내분비내과 의사는 혈액 감사 결과를 모니터에 띄워 내게도 보여 준다. 지방脂肪의 한 종류인 콜레스테롤이 혈관 벽에 달라붙어 동맥경화, 유방암, 전립선암 등을 생기게 하는 무서운 병폐에 대해 설명하다가 결론적으로 “체중을 줄이라.” 한다. 나는 언제나처럼 건성으로 “네.”하고 일어선다. 내 뒤를 따라 나온 간호사는 3개월 후 병원에 올 날짜를 정하고 그때까지 먹을 약 처방전을 건넨다. 그야말로 다람쥐 쳇바퀴 돌듯 몇 년째 반복되는 나의 병원 행각이다. 오랜 기간 약을 먹는데도 왜 콜레스테롤 수치에 변동이 없는가, 하는 생각은 하지도 않은 채 으레 그러려니 하면서 지낸다.

번뇌와 슬픔을 떠밀지 말고
오냐오냐 하며 다 받아들이며
또 한편으로는 해야 할 일을 하는 수밖엔 없다.

오냐오냐 다독거리며 이승을 떠나는 날까지 함께하려면 이 몸을 어떻게든 정비해야 할 시점에 이른 것 같다.

고통의 제물을 많이 바치는 삶이
참으로 귀하다는 생각이 든다
까닭은 역시 신비이리라.

9행부터의 시구다.
참으로 귀하다는 생각이 든다는 이승에서의 고통의 신비. 한동안 고통이 없는 편안한 날이 지속되면 “하느님이 잘 사랑하시지 않는가?” 하고 걱정했다는 클레멘스 성인 이야기도 있기는 하지만, 누구나 멀리하고 싶은 것이 괴로움이다. 헌데 지금 이 시점의 나에게 제물로 바쳐야 할 값진 고통은 무엇일까? 그것은 평생을 두고 고치지 못한 악습에서 벗어나는 일일 것이다. 정리정돈과 탐식貪食에서 벗어나는 일. 인생의 막바지에 접어든 내 생의 마지막 메뉴얼을 만들어 보자.

오래전에 읽은 헤르만 헤세의 소설 《싯다르타》에서 지금도 생각나는 구절이 하나 있다. 그가 가족을 벗어나 도를 닦는 떠돌이 탁발승托鉢僧의 무리에 합류했을 때 하루 한 끼, 그것도 익힌 음식은 먹지 않는 수행修行을 시작했다는 대목이다. 절식과 단식이 극기의 첫걸음임을 누가 모르랴.

즐거움은 날아가버리고
슬픔은 남아 가라앉는다.

내가 가장 많이 혼자서 중얼거리는 남편의 시구다. 즐거움과 슬픔을 이렇게 절묘한 대비로 읊은 송운의 솜씨에 감탄하고 깊이 공감하면서.

틈틈이 정성으로 빚은 황홀만은
주변에 뿌릴 일이다.
…(중략)…
슬프고도 황홀한 삶이다.

그는 이렇게 틈틈이 정성으로 빚은 황홀송恍惚頌을 주변에 많이 뿌리고 슬프고도 황홀한 삶을 단숨에 마감했다. 나도 고통의 제물을 많이 바쳐 이 영혼과 육신이 깨끗해지는 날 하느님이 불러주시기를 염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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