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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음!음!음! / 김규나

부흐고비 2019. 12. 12. 09:56

음!음!음! / 김규나


지난번 살던 집은 신혼부부들이 많이 사는 소형 아파트였다. 언제부턴가 깊은 밤이 되면 잠깐씩 여자의 ‘음음’ 소리가 들리곤 했다. 아래층에 신혼부부가 이사를 온 모양이었다. 여자의 소리는 간절하면서 날카로웠고 숨이 끊어질 듯 가늘고 길게 이어졌다. 남자의 소리도 간간이 뒤섞였다. 다가구가 밀집된 복도식 아파트라 정확히 어느 집에서 새어 나오는 소린지 알 수 없기도 했지만, 이웃에 누가 사는지 관심이 없던 나로서는 끝내 소리의 발원지를 확인하지 못했다. 가끔 8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리는 남자나 여자를 보게 되면 “나는 네가 지난밤에 한 일을 다 알고 있지.” 하며 아무도 모르게 쿡쿡 웃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야심한 시각, 생중계를 들으며 천장을 보고 말똥말똥 누워 있으려면 고문도 그런 고문이 없었다. 눈을 감으면 여자의 숨넘어가는 소리가 점점 크고 또렷해졌다. 청각은 시각보다 자극적이었다. 이쪽으로 돌아눕고 저쪽으로 귀를 막아도 소리는 리듬을, 리듬은 일정한 움직임을 머릿속에 고스란히 그려냈다. 귀를 막았다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가, 냉장고 문을 열고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켜도 그들의 ‘음음’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이제 그만 좀 하지. 하고 시계를 보면 고작 십여 분이 지나 있었다. 살폿, 웃음이 났다. 오래전 내가 신혼 때 세 들어 살던 집은 개인주택 이층이었다. 분명 아래층 주인아저씨와 아주머니 그리고 시집 안 간 과년한 두 딸도 이불을 뒤집어쓰고 귀를 막은 밤들이 있었겠다 싶은 것이다. 침실 창에 달그림자를 드리우던 목련이 가늘게 경련하던 밤이 떠오르자 뒤늦게 부끄러워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 후 나는 그들의 음음에 관대해졌다 남자는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마라토너처럼 호흡과 페이스를 조절하고 있었다. 여자는 남자를 응원하며 안단테에서 모데라토를, 알레그로에서 프레스토를 향해 한밤의 심포니를 완성해갔다. 남자는 월계관을 쓴 로마 병사처럼 창을 쥐고 세상과 싸울 용기를 얻었다. 며칠 새 뾰족해졌던 여자는 해변의 몽돌처럼 반들거리고 동글어졌다. 여자의 음음 교향곡이 끝나면 두 사람 모두 달고 깊은 잠에 빠졌다. 남자는 샤워를 하며 콧노래를 부르고, 여자는 하이힐을 발랄하게 아파트 복도의 아침을 깨웠다. 출근길 엘리베이터 안에서 남자와 여자는 다시 한 번 서로의 손을 꼭 맞잡았다. 그렇게 사랑하고 그렇게 아이가 생기고 그렇게 천천히, 그들도 나이를 먹어갈 터였다.

출근해서 밤의 고문에 대해 하소연을 하면 “아니, 그 상황에서 왜 소리를 내?” H가 열세 살 소녀처럼 순진한 얼굴로 시치미를 떼는 바람에 둘 다 배꼽을 잡고 웃었다. 문제는 그녀의 음음이 아니라 방음이었다.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마음껏 떠들고 뛰어놀아야 하는 것처럼, 신호부부와 건강한 연인들의 ‘어른놀이’를 위해서 건설업자들에게 침실의 튼실한 방음을 책임져달라고 건의서라도 보내고 싶었다.

도쿄에 갔을 때 섹스 숍에 들른 적이 있었다. 온갖 장난감들이 1,2층에 가득했다. 어른놀이에 그렇게 다양한 장난감이 활용될 수 있다는 게 경이로워서 턱이 다 빠질 지경이었다. 어쩌면 요란한 연인들의 이웃을 위한 귀마개도 있었을지 모른다. 섹스의 최고 도우미는 상상력이무로, 웨이트리스 복장이나 세일러복처럼 깜찍한 연출이 가능한 소품들이 시선을 끌었다. 장난삼아 하나 살까 하다가 엔화가 너무 올라서 꾹 참았다고 말하고 싶지만 머리에 떠오른 건 엉뚱하게도 공항 검색대였다.

일주일에 두세 번씩 음음 고문을 당할 때마다 그들이 이사를 가든지, 내가 이사를 가든지, 아니면 그들의 열정이 하루빨리 식길 바라는 수밖에 없다고 투덜거렸는데 어쩌다 보니 내가 이사를 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지금 사는 아파트도 층간 방음이 완전한 것은 아니어서 아래층에서 가끔 소리가 올라온다. 이번엔 음음 대신 앙앙과 왕왕이다. 깊은 밤, 잠이 깬 어린 아이의 자지러지는 울음소리, 동동 구르며 아이를 어르는 여자, 그리고 달래다 지쳐 짜증 난 남자의 훈계. 어린애가 뭘 안다고 위층까지 들리게 혼을 내? 궁시렁거리다가 예전처럼 또 살폿, 웃음이 난다. 아이의 앙앙 때문에 아내의 음음을 성취시킬 수 없는 남편의 왕왕!

고백하건대, 당시 내가 가장 바랐던 것은 그들이 서로를 쓰다듬지도 않고 뒤척이는 밤, 내가 밤새도록 ‘황홀한’ 복수를 하는 거였다. 물론, 아름다운 보복이 이루어졌는지 아닌지를 밝히는 것은 상상력과 호기심에 대한 예의가 아닐 것 같아, 이쯤에서 조용히 입을 다물기로 한다. 아무튼, 행복한 여자의 아름다운 음음이여, 영원할진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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