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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의 문을 열어본 적 있다 / 고경서(경숙)


1. 열기

모니터를 켠다. 한글 문서에서 커서가 뛴다. 펄떡펄떡 살아 움직인다. 남해바다 물고기 같다. 머릿속에는 상념들이 갇혀 떼 지어 몰려다닌다. 흰 파도소리가 출렁이는 대뇌는 감성언어들의 놀이터다. 낚싯대로 헛챔질하듯 마우스를 이리저리 옮겨본다. 미끼를 던지고, 촉각을 곤두세워도 기다리는 영감은 오질 않는다. 상상이라는 그물망을 펼친다.

수필을 쓰려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화자는 작가 자신이며, 자신의 삶을 형상화한다. 일상의 경험이나 과거의 기억을 체화하는 만큼 자전적 성격이 강하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 그러나 지금 구상하려는 작품은 이와 다르다. 체험도 아닐뿐더러 감각기관이 인지하는 사물도 아니다. 내면 풍경이다. 이는 '사실을 진솔하게 고백한다'는 수필 특성상 한계로 지적되는 대목이다. 그렇다고 선험적 지식만으로 스토리텔링을하기에도 뭔가 미흡하다.

이러한 감정의 파고는 매번 겪는다. 수필이 허구임을 배제하는 장르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과거의 기억이나 경험을 현재적 시점으로 재구성하려면 상상력이라는 변용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감성 및 지성과 함께 수필의 문학성과 예술성을 연계하는 필요충분조건이 상상력이다. 그러므로 수필 창작에서 상상력이 탐구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2. 배꼽마당, 수필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수필 창작에 있어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가'라는 이 명제는 항상 고민하게 만든다. '무엇'은 작가가 독자에게 전하는 주제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소재나 제재는 광범위하게 편재해 운용의 폭이 비교적 자유롭다. 내 경우는 결핍과 잉여, 실존과 부재가 작품 속에 길항하고 있다. 욕망에서 퇴출당한 애환이나 상처의 언저리를 낚아 채다 보니 감상적感像的 분위기가 농후하다. 글쓰기는 불화하는 세상과 화해를 모색하고, 훼손된 상실감을 치유하는 과정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러나 '어떻게'라는 방법론에 이르면 난감해질 수밖에 없다. 기억들은 대개 애매하고 자의적이라 과거의 체험과 똑같이 복구하거나 재현하기가 쉽지 않다. 재현해내더라도 과거에 속한 현재는 새롭지가 못하다. 게다가 세상을 바라보는 남다른 시각과 인생관이 담겨져 있어야 하는 부담감도 크다. 따라서 수필이 가지는 고유성이나 독자성을 침해받지 않으면서 존재의 근원과 진실을 탐구하는 문학적 장치가 바로 상상력이다.

국어사전은 상상력을 '실제로 경험하지 않은 현상이나 사물에 대하여 마음속으로 그려보는 힘'이라고 정의한다. 가시적인 것보다 비가시적인 것들을 밝히거나 꾸며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 재해석하는 작업이리라. 누구든 외부세계를 감각하고 인지할 때 비슷하게 보고, 생각하고, 공감하지 않는가. 이때 가상의 세계에서 상상력에 기대어 의미를 도출하고 대상을 다른 사물로 변환하여 형상화함으로써 문학적 가치와 심미안을 가진다. 이는 작가의 내면에 깃든 주관적이고 관념적인 진술을 창조적인 언어로 풀어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비슐라르는 "욕망으로서의 상상력, 이것이 역동적 상상력"이라고 언급했다. 어떤 대상이 겪는 변화가 자연적인 산물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이라는 뜻이다. 일테면 의지의 상상력이 곧 역동적 상상력이다. 상상력은 내면에 잠재된 의식의 표출이요, 현실과 환상 사이에서 심상을 이끌어내는 에너지다.

졸작 <감성어 낚시>는 수필 창작 과정을 상상력으로 그렸다. 수필 쓰기를 위한 수필인 셈이다. 이 작품을 텍스트로 하여 상상력을 나름대로 진술하고자 한다. 창작이란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상상으로 표현해 만들어내는 작품이 아닌가. 바닷물고기인 감성돔을 모티프로 삼았다. 예전부터 비늘이 가진 은백색 광휘와 곧추세운 등지느러미, 형형한 눈빛에 매료되었다. 어느 날, 티브이에서 낚시꾼이 잡은 감성돔이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장면을 시청하다가 지난날의 기억이 겹쳐지면서 착상에 걸려들었다.

감성돔에 대한 정보를 다각적으로 수집했다. 고향에선 감성돔을 감성어라고도 부른다. 물고기 감성어를 낚아 올리듯 감성적인 수필을 건져 올렸으면 하는 바람으로 생각을 궁굴렸다. 하지만 직접 낚시한 경험이 없다보니 전략적으로 상상력으로 끌고 갔다. 먼저 사건과 섬, 바다, 달 등을 배경으로 하는 서사적인 구조를 택해 사유를 심화시켰다. 주관적인 진술은 독자로부터 설득력을 잃는다. 이렇게 대상을 객관적으로 인식하여 유사한 사물을 끌어들이면서 은유를 통해 관념을 해방시켰다. 감성돔을 감성感性, 감성언어 또는 감성어語로 의미를 동원하였다.

이곳은 대뇌라는 바다다. 리아스식 해안처럼 들쭉날쭉한 전두엽의 해역이다. 먼 과거로부터 현재, 미래에 이르는 생의 해류를 타고 이동해가는 욕망의 바다, 이를테면 의식과 무의식을 넘나드는 생각이나 기억 따위가 유영하는 황금어장인 셈이다.
- <감성어 낚시>에서

위와 같이 서두를 정하니 얼개가 쉽게 짜여졌다. 우선 수필이 독자에게 어떻게 읽히는지를 간파하고, 삶과 연관시켜 구체적으로 표현했다. 감성돔은 내 안에 존재하는 욕망의 화신이다. 오관을 열고, 억압된 욕망을 암중모색하면서 내밀하게 관찰에 나섰다. 시간이 흘러도 영감이나 직관은 떠오를 기미가 없다. 상념들만 꼬리에 꼬리를 문다. 상상이라는 미끼로 밑밥을 쳐도 입질이 들어오질 않았다.

상상력을 구체화하는 방안으로 쉬클로프스키의 '낯설게 하기'를 적용시켰다. 이는 '새롭게 보기'로서 시적 은유의 표현기법이다. 자연이나 물상. 경험 등 일상의 진부하고 상투적인 낯익음을, 낯설게 전환시켜 의미화를 통해 새로운 이미지를 제시한다. 대상을 비틀어 쥐어짜고, 뒤집어가며 삐딱하게 본다. 주관적인 감정과 일상어에서 벗어나 참신한 시각으로 사물을 인식하는 방법이 은유다. 이때 행위의 주체와 대상 간에 거리두기가 필요하다. 둘 사이의 거리가 가까우면 감정이입이 적어 일상성에 머물지만 간격이 커질수록 의미생성이 다양하고 풍부해진다. 이때 상상력이 촉매제 역할을 하면서 동일화가 이루어지고, 심미적 접근으로 예술미를 획득한다.

그리고 한자어인 동음이의어同音異議語를 활용했다. 동음이의어는 같은 소리에 발음은 같되 다른 뜻을 가진 말이다. 처음부터 의도한 대로 감성漁를 감성어語로 짝짓기를 했다. 이것은 언어를 가시화하는 방법으로 사물이 가지는 속성이나 환경 등 유사사물에서 이질적인 것들을 대립시켜 공유하는 방식이다. 예컨대 '낚시꾼'은 '작가'로, '미끼'는 '상상력'으로, 작품의 배경인 '심해'는 '대뇌'로, 물고기 잡는 행위인 '낚시'는 '창작'으로 관계설정을 끝냈다. 그리고 내면을 응시하고 관조하면서 대상이 지닌 사유를 심화시켰다. 황홀하고 짜릿한 손맛은 창작의 고통에서 느끼는 카타르시스. 이때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감성어魚가 감성語, 즉 수필로 탄생한 것이다.

3. 닫기

상상력 없이 수필을 쓸 수 있을까. 수필로 들어가는 문은 넓으나 들어가면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다. 굳게 닫힌 문 안에 옥죄이기보다 탈주를 꿈꾸기 위해 상상력을 작동하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행위는 복잡하고 까다롭지만 감정과 정서가 새로운 이미지로 영역을 확장하면서 작품의 주제를 표상한다.

수필을 사실 그대로만 기록하고, 허구를 배제한다면 문학성이나 예술성이 약화될 수밖에 없다. 이는 작품의 내용이나 형식상 한계로 지적되어 왔다. 고정관념을 버리고 편견 없는 시선으로 사물이나 현상을 직시하고, 비유와 상징으로 미적 아름다움을 형상화하는 창조적 상상력이야말로 이러한 장르적 규정을 극복하는 방안으로 바람직하다. 졸작 <감성어 낚시>는 창작의 고뇌를 비유했다. 이는 상상력에 의존한 실험수필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러고 보니 상상력은 사실을 바탕으로 하는 허구성을 암묵적으로 수용하는 자세라고나 할까.

아직도 상상의 바다다. 겹겹의 어둠을 밀어낸 모니터가 환하다. 활자들이 헤엄치는 자판을 두드린다. 판타지가 포말을 일으킨다. 찰나의 순간에 포획한 감성어가 삶을 만들고, 문학이 되고, 예술이 되리라. 쓰고 지우고, 다시 고쳐 쓰기를 반복한 나는 외로운 강태공. 마침내 A4 용지를 삼킨 감성어 한 마리를 출력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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