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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벌레 / 노혜숙

부흐고비 2019. 12. 14. 20:51

벌레 / 노혜숙


꿈틀꿈틀, 난 수상한 시절인연으로 ‘진지충眞摯蟲’이란 별칭을 갖게 된 ‘사람’이다. 그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
진지眞摯:말이나 태도가 참답고 착실함.
충蟲:벌레

벌레의 어원: 한국어 ‘벌레’는 세소토어 beleha (to beget)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애를 얻는다는 뜻이니, 우글거리는 ‘곤충의 애벌레’를 의미한다.

두 단어를 합치면 말이나 태도가 참답고 착실한 벌레란 뜻이 된다. 뒷말이 앞말을 뒤집고 억누른다. 참답고 착실하면 벌레, 구더기 같은 애벌레로 비하되는 세상이다. 가볍고 초감각적이고 안개처럼 무상한 세상에서 진지는 무겁고 부담스러울 테다. 감정 과잉이고 에너지 낭비로 여겨지기 십상이다.

진지충의 특징은 매사 의미부여하기다. 말이든 사물이든 본질적으로 왜? 왜? 의미를 파고든다. 사실 골치 아프고 피곤한 일이긴 하다. 세상만사 어디 그리 명쾌한 해답이 있던가. 가장 우매한 질문은 형이상학적인 것이라지. 답이 없는 문제에 연연하지 마라, 대충 넘어가라, 그냥 즐겨, 그냥 사는 거야, 그래야 벌레가 되지 않을 수 있어. 혹자의 충고다.

진지충은 낯가림이 심한 편인 데다 비사교적이다. 특히 놀이방에서의 처신은 영 젬병이다. 가능한 구석에 앉는다. 술잔이 오가고 그 술보다 더 취하게 하는 말들이 오간다. 성적 배설의 카타르시스가 질펀하다. 진지할수록 초라해지는 자리, 혼란스럽다. 그들은 정말 그 허망한 말들의 성찬을 즐기고 있는 것인가? 농담조차 토론의 화두로 바꿔버리는 진지충의 진지야말로 상대를 뒤집어지게 하는 요소다.

특히 진지충의 연애 스타일은 따분하다. 생각이 많다보니 재는 시간이 길다. 바람은 당연히 사절. 고지식하게 사랑 앞에 진정성을 강요한다. 21세기 대부분의 사랑은 호르몬의 농간이고 애당초 무모한 감정의 유희라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 지금의 예스는 단지 지금만 유효하다는 사실도. 열 번 발등을 찍힐지언정 사랑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못하는 우직한 로맨티스트이기도 하다.

진지충의 이웃사촌은 설명충說明蟲이다. 그 둘을 동시에 지닌 충은 왕따를 면치 못한다. 진지하다 보면 설명이 길어지기 쉽다. 눈치 없이 친절한 금자 씨가 되는 거다. 말의 속도는 결코 생각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경청 여부는 단 몇 초 만에 판가름 난다. 진지는 무겁고 설명은 거추장스럽다. 더구나 이모티콘 기호가 말을 압도하는 시대, 세련되고 싶다면 진지와 설명은 엿 바꿔 먹으라는 세상이다.

꿈틀꿈틀, 귀도 가렵고 생각도 가렵다. 말이나 태도가 참답고 착실한데 왜 벌레가 되어야 한단 말인가? ‘더 이상 의미를 묻지 않는 세상은 영혼 없는 전문가들로 넘쳐나게 된다’고 말한 철학자는 빅터 프랭클이었던가. 시대가 변했다고? 미친 속도에 휘말려 멀쩡한 사람 벌레 만드는 세상 따라가는 건 잘 하는 일인가? 감히 사람에게 벌레란 별칭을 부여하는 그들은 누구인가? 배후 주동자는 필경 이 시대 영악한 마키아벨리의 후예들이 섬기는 유일신 자본주의일 터다.

진지충은 예의 그 진지한 사고를 발휘하여 그들의 의중을 헤아린다. ‘한 마디로 난 너보다 훨씬 잘났어. 난 널 벌레라 부를 자격이 있지. 넌 나와 같은 줄에 설 자격이 없어. 불쾌해. 내 밥그릇 넘보지 말고 꺼져.’ 비하 속에 깃든 그들의 근거 없는 특권의식은 얼마나 위험한 폭력인가? 제아무리 그럴듯하게 포장을 해도 결국 제 밥그릇 지키기 위한 불안에서 나온 공격적 표현들 아닌가.

벌레의 종류는 또 얼마나 다양한지. 아이를 제대로 단속하지 않는다고 맘충, 의학전문대학원 나와 의사가 된 사람들을 비아냥대는 의전충, 농어촌 전형이 포함되는 기회균형선발전형으로 들어온 학생들을 ‘기균충’, 지역균형선발을 비하한 ‘지균충’이란 말도 나왔다. 일베충, 무뇌충, 로퀴충, 페북충…. 앞으로 새로운 이름을 가진 아니, 더 자극적인 이름을 가진 인간벌레들이 출현할 것이다.

사실 벌레는 인간과 공생하는 파트너이고 생태학적 관점에서는 자연의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도 크다. 게다가 벌레를 미래의 식량자원으로 고려하고 있는 마당에 오직 박멸의 대상으로만 볼 존재가 아닌 것이다. 인간을 해충, 벌레로 비하하는 그 시선에는 약자에 대한 관용과 배려는 없이 시장주의 효율성 관점으로만 대상을 보는 냉혹함이 있다. 사는 게 전쟁이라지만 그 전쟁의 진정한 승리는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하는 공생의 방식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기진맥진한 진지충의 귀에 한소리가 명료하게 들려온다.
‘못 말리는 진지충, 또 설명이군. 역시 부담스러운 존재야. 감히 우리의 양심을 건드리다니!’
꿈틀꿈틀, 진지충은 힘껏 겨드랑이 가려움을 떨치고 자라목처럼 움츠러들었던 감성촉수를 활짝 편다. 바야흐로 혐오스러운 허물을 벗고 화려한 변신을 할 날이 도래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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