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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화두 / 노혜숙

부흐고비 2019. 12. 14. 20:50

화두 / 노혜숙
The 수필, 2019 빛나는 수필가 60인 선정작


어떤 이미지는 우연히 마음에 스며들어 평생의 화두가 된다. 오랜 세월 의식을 부침하던 그림의 이미지가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낸 건 오십이 넘어서였다.

‘겨울 산을 오르는 사람’— 한 남자가 눈보라 치는 산길을 혼자 오른다. 폭설에 묻혀 사라진 길 위에 새로 길을 내며 걷는다. 눈 위에 찍힌 발자국이 깊고 뚜렷하다. 신중하지만 머뭇대지 않는 걸음새. 흔들림 없는 뒷모습에선 정면 돌파의 결단이 느껴진다.

겨울나무 같은 남자의 결기가 나의 우유부단함을 자극했던 것일까. 여백에 씌어 있던 시구는 잊었어도 남자의 뒷모습은 오래 잊히지 않는 풍경이 되었다. 내가 겨울 산에 막연한 동경을 갖게 된 것도, 등단 작품의 배경을 겨울 산으로 쓰게 된 것도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중년에 이르러 최북의 그림 〈풍설야귀인風雪野歸人〉에 마음이 끌린 것도 비슷한 연유이지 싶다. 〈풍설야귀인〉은 유장경의 한시 〈봉설숙부용산逢雪宿芙蓉山〉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눈보라치는 어둔 밤, 한 나그네가 시동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지팡이를 짚은 노인의 걸음이 거침없다. 첩첩산중 갈 길은 먼데 바람은 나뭇가지가 부러질 듯 거세다. 낯선 기척에 외딴집 검둥개까지 나와 극성맞게 짖어댄다. 시동의 숨 가쁜 걸음에, 미처 땅에 닫기도 전 움직이는 노인의 지팡이까지 생생한 현장감이 압권이다.

최북은 세상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송곳으로 제 눈을 찔러 애꾸를 만든 화가였다. 혹자는 그를 근본도 없는 광인이라 했지만 사실 그는 강세황과 더불어 심사정, 정선 다음으로 손꼽히는 조선시대 화가였다고 한다. 호생관毫生館이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최북은 그림으로 호구를 연명한 사람이었다. 내켜야 그리고 내켜야 팔았다. 벼슬아치입네 자신을 업신여기면 그 자리에서 그림을 찢고 돈을 돌려주었다. 그리기 위해 살고 살기 위해 그렸다. 아니, 그리기 위해 술을 마시고 마시기 위해 그렸다. ‘나는 내 길을 가겠노라’, 신분차별이 심했던 조선시대 왕실의 광대가 되기를 거부하고 겨울나무 같은 기개를 지녔던 고독한 환쟁이였다. 그는 제 그림 속 나그네처럼 그림을 팔아 술을 마시고 돌아오는 길에 눈 속에서 동사했다.

그의 생애가 내게 던진 화두는 하나였다. 인생이라는 겨울 산을 정면으로 돌파해 나갔다는 것. 나는 그 반대쪽에 있는 사람이었다. 사실과 직면하기 전에 마음이 먼저 주저앉았다. 어떻게 하면 산 같은 시련들을 피할 수 있을까. 해결의 실마리를 모색하기보다 지레 포기를 선택했다. 어쩔 수 없다는 식이었다.

생각해 보면 인생 자체가 장애물 경기였다. 고산준령 한두 개쯤 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높낮이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누구나 크고 작은 생의 겨울 산을 오르락내리락하기 마련이었다. 문제는 산을 바라보는 내 마음의 눈이었다. 툭툭 털고 일어설 수 있는 작은 돌멩이를 바윗덩이로 여겼다. 느긋하게 숨 고르면서 넘을 수 있는 등성이도 태산인 양 압도되었다. 맞닥뜨리기보다 물러서고 도망치기 바빴다. 삶의 근력이 생길 턱이 없으니 늘 고통에 취약했다.

어느 겨울 태백산을 오른 적이 있었다. 폭설이 내려 무릎까지 빠지던 날이었다. 눈을 뒤집어쓴 나무들은 허리를 구부린 채 간신히 서 있었다. 길은 눈에 묻혀 보이지 않았고, ‘산다람쥐’인 친구도 겨우 길을 찾아냈다. 가파른 길은 끝이 보이지 않았고 호흡은 짐승처럼 거칠었다. 친구는 침착하게 호흡법을 가르쳐주며 속도의 완급을 조절했다.

수도 없이 미끄러지고 넘어지며 점심때가 기울어서야 산 정상에 다다랐다. 눈을 들어 바라본 순간 펼쳐진 설경에 아뜩해졌다. 신세계였다. 그때 거기 오르지 않고는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눈꽃나무가 된 주목들이 우뚝우뚝 서 있었다. 뭉텅 꺾이고, 찢기고, 속이 비었어도 여전히 위용을 잃지 않고 있었다. 아니, 죽어서 더 기품 있는 나무가 주목이었다. 태백산의 신령한 기운이 거기서 나오는 게 아닐까 싶었다. 이 무슨 생고생이냐고 투덜거리던 자신을 반성했다. 또 다른 세계를 등정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은 몸으로 깨우쳐 얻은 보상이었다.

작가란 이름이 더 이상 특별하지 않은 세상, 나도 말석에 한 이름을 얹어 글을 쓰게 되었다. 문학이란 겨울 산에서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문단은 넘어야 할 또 다른 협곡이었다. 무한 리필. 달라는 대로 쓰면서도 최북처럼 배짱을 부릴 용기는 없었다. 그의 자존심은 당대 최고의 화가들과 견줄 만한 실력에 있었다. 무엇보다 그에게는 기꺼이 고독과 가난을 감수하겠다는 단단한 내공이 있었다. 제 그림에 정당한 평가를 요구하면서도 지나친 대가에 대해서는 비웃을 줄도 알았던 기인 화가. 그가 세속의 평판과 호의호식에 연연하였다면 당대 최고의 환쟁이는 되지 못했으리라. 자존심은 그렇게 세상의 눈보라를 뚫고 고독하게 자기만의 고지에 오른 사람의 특권 아닐까.

젊은 날 보았던 겨울 산 그림은 인생의 수많은 산들을 어떻게 넘어야 하는지에 대한 화두였는지 모른다. 일찌감치 그 의미를 예감했던 것과 달리 나는 현명하게 살지 못했다. 오래도록 막연한 패배의식과 두려움, 불안이라는 산맥에 갇혀 고전했기 때문이다. 정상에 오르는 걸음이 한 자 남짓의 보폭이듯 깨달음의 길에 비약은 없었다. 내게 정면 돌파란 그 허깨비들의 정체를 직시하며 우직하게 한 발짝씩 산을 넘는 것, 동굴 안에서 꺽꺽거리던 욕망에 숨길을 틔워 주고 마침내 숨 죽은 자존의 그늘에 꽃 피게 하는 것이리라.

마음의 들창을 열어젖혔다. 동토를 치받고 올라오는 내 안의 저 여린 봄꽃들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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