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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깃들이다 / 김은주

부흐고비 2019. 12. 16. 09:26

깃들이다 / 김은주
The 수필, 2019 빛나는 수필가 60인 선정작


아마 이른 봄이었나 보다. 겨울 일을 막 끝내고 풍성하게 주어진 시간을 바느질로 달래고 있는데 베란다 광목 커튼 뒤가 이상하게 수상쩍다. 꾸르륵 꾸르륵, 창자가 밥을 밀어내는 소리 같기도 하고 어찌 들으니 개수대에 물 빠지는 소리 같기도 하다. 자투리 천으로 말 여러 마리 만들고 고무신 한 켤레를 다 깁는 사이에도 정체 모를 소리는 내내 주위를 맴돌았다. 창밖은 위태로운 난간이고 강을 끼고 있어 사나흘이 멀다 하고 바람이 불어대니 그 무엇도 깃들 틈이 없는 곳이다. 소리의 정체가 궁금하긴 했으나 아직 바람이 차니 창을 열어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다 변화무쌍한 봄 날씨는 황사 바람이 몰아치고 볕이 났다가 또 사월에 함박눈까지 내렸다. 조석으로 변하는 날씨에 휘둘리다 묘한 소리는 사라진 줄 알았다.

소리를 등한시하고 잊어갈 즈음 커튼 뒤에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서쪽으로 비스듬히 빛살이 기울어지는 시간이라 펼친 날개는 더욱 선명했다. 펼쳤다 다시 접고 잠시 멀리 날아갔다 돌아오는 모습이 흡사 어린 시절 자주 하던 그림자놀이 같다. 두 그림자가 겹쳐지더니 다시 분리되고 한 그림자가 다른 그림자의 머리를 쪼아대기도 한다. 창밖에는 봄꽃이 다투어 피었는데 커튼 뒤, 두 그림자는 물색없이 뜨겁다. 속수무책 말릴 새도 없이 날갯짓 분주하다. 다정한 풍경 앞에 앉아 바느질 삼매경에 빠진 나는 어인 일로 볼이 붉게 달아오르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어룽대는 날개의 크기로 봐서는 작은 새가 아닐 성싶어 그제야 창을 열어보니 에어컨 실외기 사이에 비둘기 두 마리 머리를 맞대고 있다. 창에 몸을 붙이고 길게 고개를 빼 내다보니 놀랬는지 허겁지겁 실외기 뒤로 몸을 숨긴다. 머리와 몸통만 겨우 숨기고 미처 말아 넣지 못한 꼬리가 심하게 떨린다. 떨리는 꼬리를 보고 있자니 상대가 원치 않는 관심은 곧 불안이라는 생각이 든다. 집에 생명이 깃들었다는 반가움과 수북한 나뭇가지 위에 배설물을 보며 기쁨과 근심이 정확히 두 덩이다.

봄 내내 날이 새기가 무섭게 창을 열어 새들의 안부를 확인하고 바람이 심하게 부는 밤은 번뇌 덩어리를 껴안고 잠이 들었다. 근래 먹어 보지 못한 순정한 마음이다. 살피고 염려하는 마음이 어디 숨어 있다가 이제 나타났는지 봄꽃처럼 사태를 이뤘다. 살피다 보면 은연중에 사랑도 깃드는지 겨우내 냉랭하던 심장이 한결 말랑해졌다.

좁고 위태롭지만, 둥지를 품고 앉은 새의 등이 눈부시다. 회색 깃털을 한껏 부풀려 품고 있는 생명은 몇이나 되는지 꽃 지고 파르라니 숲이 일어서는데도 통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꽃 사태가 나고 다시 초록이 산을 넘어오는 동안 나는 아니 보는 척 멀찍이 서서 새의 등만 바라봤다. 적당한 무관심과 애정 어린 방치는 내가 새에게 기울일 수 있는 다른 방식의 사랑이다. 두어 달 무심히 새를 바라보며 하해와 같은 사랑도 적당한 완급조절이 필요함을 새삼 느낀다. 꽃 피고 지는 사이 통통하던 어미 등이 눈에 띄게 야위었다. 날개가 수척해지고 몹시 먹이가 마려운 눈빛일 때 푸른 생명 넷이 알을 깨고 세상에 나왔다.

봄 가뭄이 길어지더니 다시 비가 잦아졌다. 여름 소나기처럼 요란하게 내리는 봄비에 아직 눈도 못 뜬 아기새는 맨살이다. 애가 타 목을 빼고 내다봐도 달리 내가 해줄 것이 없다. 가까이 갈 수도 만질 수도 없으니 마음만 졸이는 애물단지다. 쪼그리고 앉아 비를 맞으며 핏덩이 넷을 가슴에 품은 새는 등이 시려 보인다. 코를 박고 끌어안았지만, 어미 배 아래로 붉은 맨살이 삐져나온다. 살살 몸을 좌우로 흔들어 몸 밖으로 밀려난 살점을 끌어모아 둥글게 만다. 눈치 없는 비는 그칠 줄 모르고 등은 젖었지만 품어 안은 가슴 안쪽은 한없이 따뜻해 보인다. 더 말할 것도 없는 엄마 품이다. 난간에 매달린 빗물이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바람이 부는 대로 떨어져 내린다. 10층에서 내려다보니 둥지 밖은 천 길 낭떠러지다. 위태로운 곳에서 어린 목숨을 지켜낸다는 것, 무주공산 힘없이 떨고 있는 것을 품어낸다는 것, 무작정 내 전부를 들이밀고 나를 바친다는 것, 어미니까, 아니 어미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다.

씻은 듯이 비 그치고 볕 좋은 여러 날이 지났다. 꽃 진 자리에 초록이 짙어지고 위태롭던 둥지는 그새 좁아 보인다. 애처롭던 맨살은 간 곳 없고 날개 죽지에 회색 깃털이 무성하다. 주야로 품고 있던 어미도 설렁설렁 난간을 걸어다니며 산책을 즐기고 때로는 멀리 날아가 한참 만에 돌아온다. 어미 없이도 둘레둘레 모여 앉아 한나절 잘도 논다. 대견하리만치 훌쩍 자랐다. 제법 씨알이 굵어진 등을 바라본 게 어제였던 것 같은데 오늘 보니 두 마리가 사라졌다. 둥지를 드나드는 어미 새의 발길도 뜸해지고 가끔 내다보면 아파트 건너 피아노 집 앞 전깃줄에 앉아 쉼 없이 꾸르륵대고 있다. 아니 갈 터이니 스스로 날아오라는 신호다. 이소離巢의 순간이다.

눈부처 바라보듯 지극했던 내 눈길도 이제 거둬야 할 때다. 한철 몰입의 단맛에 빠져 꽃이 폈는지 졌는지도 모르고 살았다. 누군가의 안을 골똘히 응시하는 일은 그곳을 향해 끝없이 말을 거는 일이다. 꽃놀이도 마다하고 새와 나눈 수다에 봄을 옴팡 탕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시간이 하나도 아깝지 않은 이유는 뭘까? 생명이 주는 공것 같은 즐거움 그 즐거움을 어디 꽃 피는 일에 비하랴. 봄꽃보다 더 설레는 두 생명이 아직 내 곁에 남아 깃을 고르고 있다. 볕 좋은 날이 쌓이고 쌓여 도톰해진 느티나무 숲으로 날아갈 때까지, 봄이 돌아오지 못할 만큼 이울 때까지, 봄날의 사랑은 아직 창밖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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