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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세월의 흔적 / 염희순

부흐고비 2019. 12. 16. 09:16

세월의 흔적 / 염희순
The 수필, 2019 빛나는 수필가 60인 선정작


오후 늦게 바다를 찾았다. 남편 낚시 가는 길에 따라나섰는데, 간만에 사색도 하고 스마트폰 노트에 글도 써본다.

한눈에 들어오는 해안이 아담하다. 물이 많이 빠졌다. 드러난 바위들이 넓은 운동장을 이루었다. 썰물 때 갯벌에 물길이 드러나듯이 바위틈 사이로 바닷물이 고여 구불구불 길이 났다. 더러 작은 웅덩이도 생겼다. 바다 물풀 가득한 그 속에서 치어들이 잘방댄다. 물기가 마른 널찍한 바위 위에 앉아본다. 자세히 보니 바위에 잔잔한 물결무늬가 새겨져 있다. 너무 정교해 손바닥으로 바위를 쓸어보면 찰랑거리는 물결의 감촉을 느낄 수 있을 것만 같다. 하루 이틀 사이에 이 무늬가 새겨졌겠는가.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은 이렇게 물속에서도 흔적을 남긴다.

며칠 전 허리가 아파 엑스레이를 찍었다. 오늘 그 결과를 보는 날이었다. 의사가 내 엑스레이 필름을 형광판에 끼웠다. 저 뼈대의 주인이 나라니! 마치 무덤 속 내 유골을 보듯 섬뜩했다. 의사가 자를 들어 골반에 대고 빨간 펜으로 수평선을 그었다. 오른쪽, 아니 왼쪽 골반이 현저하게 올라와 있었다. 골반이 틀어졌단다. 그래서 다리와 허리에 통증이 온다고 했다. 다음은 척추 옆모습 필름을 끼웠다. 의사는 또 빨간 펜으로 위에서부터 유연한 S자 곡선을 그었다. 내 뼈는 일자에 가까웠다. 척추 4, 5번 디스크가 약간 튀어나온 게 보였다. 5, 6번 사이는 좁아져 있었다. 심한 디스크는 아니나 퇴행성이 진행 중이라고 했다. 뼈 교정과 운동법을 병행해야 한다고 했다.

치료에 들어갔다. 침대에 누웠더니 오른쪽 다리가 1센티 이상 더 길다고 했다. 어긋난 골반 뻐쩡한 척추, 아까 본 엑스레이 사진이 떠올랐다. 의사가 오른쪽 다리를 들어 올려 뒤쪽으로 원을 그리는데 얼마나 민망하던지. 삐꺼덕 소리가 안 나니 다행이다 싶었다. 소리 없이 흐르는 세월 속에 바위가 바닷물에 조용히 깎이듯이 내 척추는 기척 없이 휘고 골반은 틀어져 갔다. 이토록 서글픈 흔적을 남기고 가는 세월을 눈치채지 못하고 흘려보냈다니.

나는 지금 호주에서 살고 있다. 한국에서 살던 시간이 추상적이었다면 여기서는 구체적이다. 순간은 아니더라도 매시간을 의식하며 산다고나 할까. 호주는 임금을 시급(時給)으로 계산한다. 나는 시급 30불(대략 25,000원) 인생이다. 풀타임이 아닌 파트타임이며 주급(週給)으로 받아 매 주말 집세를 내고 먹고 살 음식을 산다. 한 시간 번 돈으로 삼겹살 두 근을 사고 30분 번 돈으로 샌드위치와 커피로 점심을 때우고 10분 번 돈으로 가끔 생맥주도 한 잔 마시는 사치를 부리기도 한다.

돈을 번다는 것이 생명 유지와 직결되어 있음을 여기서 이렇듯 실감하며 산다. 얼마 전에 본 영화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바닷가 하늘 위로 아까부터 경비행기가 왔다 갔다 하더니 하늘에 글씨를 써놓았다.

"JESUS SAVES JESUS."

예수님이 영생을 준다고 했던가.

유한한 생을 사는 우리야 생존 유지를 위해 안간힘을 쓰며 살 수밖에. 먹고 사는 일만큼 중요하고 숭고한 것이 또 있겠냐마는 살기 위해 허겁지겁 사는 인생은 허망하기 짝이 없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노을이 진다. 참 곱다. 이곳 노을은 화사해서 슬픈 느낌이 들지 않는다. 오히려 경쾌해진다. 한국의 노을이 처절한 핏빛의 유화 같았다면 호주의 노을은 해말간 홍시 빛의 수채화 같다.

오늘 나는 바닷가에 지불은 안 했지만,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비용을 지불한 것이니 내 수명의 몇 시간을 치른 셈이다. 그러나 밑졌다는 생각은 안 든다. 쓸 데 쓴 것이다. 영화에서 엄마가 밀린 대출비를 벌기 위해 생일날 야간 근무를 해야 함에도 주인공에게 맛있는 점심 사 먹으라고 수명의 30분을 옮겨주듯이(결국 엄마는 예고 없이 오른 버스비로 30분이 모자라 그다음 날 죽고 만다.), 아들은 또 그 귀한 시간을 출근길에 어떤 소녀가 고지서 낼 돈이 없다고 구걸하자 5분을 덜어주고 직장동료에게 4분짜리 커피를 사 주듯이, 어디에 내 시간을 쓰느냐가 어떻게 사느냐의 답인 것이다.

내 몸 구석구석 세월의 흔적이 조금이라도 누군가를 위한 것이었다면 노화가 그렇게 슬프지 않을 것 같다. 저 고운 노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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