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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돌의 미학 / 조지훈

부흐고비 2019. 12. 28. 11:14

돌의 미학 / 조지훈1


돌의 맛─그것도 낙목한천(落木寒天)의 이끼 마른 수석(瘦石)의 묘경(妙境)을 모르고서는 동양의 진수를 얻었달 수가 없다. 옛 사람들의 마당귀에 작은 바위를 옮겨다 놓고 물을 주어 이끼를 앉히는 거라든지, 흰 화선지 위에 붓을 들어 아주 생략되고 추상된 기골이 늠연(凜然)한 한 덩어리의 물체를 그려 놓고 이름하여 석수도(石壽圖)라고 바라보고 좋아하던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흐뭇해진다. 무미한 속에서 최상의 미를 맛보고, 적연부동(寂然不動)한 가운데서 뇌성벽력(雷聲霹靂)을 듣기도 하고, 눈 감고 줄 없는 거문고를 타는 마음이 모두 이 돌의 미학에 통해 있기 때문이다.

동양화, 더구나 수묵화의 정신은 애초에 사실이 아니었다. 파초 잎새 위에 백설을 듬뿍 실어놓기도 하고, 10리 둘레의 산수풍경을 작은 화폭에다 거두기도 하고, 소주(蕭酒)한 산봉우리 밑, 물을 따라 감도는 오솔길에다 나무꾼이나 산승(山僧)이나 은자를 그리되, 개미 한 마리만큼 작게 그려 놓고 미소하는 그 화경(畵境)은 사실이기보다는 꿈을 그린 것이었다. 이 정신이 사군자(四君子), 석수도(石壽圖), 서예(書藝)로 추상의 길을 달린 것이 아니던가?

괴석(怪石)이나 마른 나무 뿌리는 요즘의 추상파 화가들의 휼륭한 오브제가 되는 모양이다. 추상의 길을 통하여 동양화와 서양화가 융합의 손길을 잡은 것은 본직적으로 당연한 추세라 할 수 있다. '살아 있다'는 한 마디는 동양미의 가치 기준이거니와, 생명감의 무한한 파동이 바위보다 더한 것이 없다면 웃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돌의 미는 영원한 생명의 미이다. 바로 그것의 추상(抽象)이다.

내가 돌의 미를 처음 맛본 것은 차를 마시다가 우연히 바라본 그 바위에서부터였다. 선사(禪寺)의 다실에 앉아 내다본 정원의 돌이었다. 나의 20대의 일이다. 나는 한때 일본 경도(京都)의 묘심사(妙心寺)에서 선(禪)에 든 적이 있었다. 1천 7백측 공안(公案)을 차례로 깨쳐 간다는 지극히 형식화된 일본선(日本禪)은 가소로웠지만, 선의 현대화를 위해선 새로운 묘미가 아주 없는 것도 아니었다.

특히 흥미로웠던 것은 사뭇 유도처럼 메다꽂기도 하고, 공부가 모자라 벌을 설 때는 한겨울이라도 마당에 앉혀 놓고 밤을 새워 좌선을 강행시키는 그 수련(修鍊)에서 준열한 임제종풍(臨濟宗風)의 살활검(殺活劍)의 고조를 볼 수 있던 일이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나는 이 선의 수행에서 싫증이 났었다. 그래서 틈만 있으면 다실에 가서 다도를 즐기며 정원을 내다보는 것이 낙이 되었다. 일본의 정원 미술은 다실과 떠나서 생각할 수 없고, 다도는 선과 떼어서 생각할 수가 없는 것도 다 아는 사실이다. 묘심사에는 다도의 종장(宗匠) 한 분이 있었다. 나는 가끔 이 노화상(老和尙)과 대좌하여 다도를 즐기며 화경청적(和敬淸寂)의 맛을 배우곤 하였다.

녹차를 찻종에 넣는 작은 나무 국자를 찻종 전에다 땅땅땅 두드리는 것은 벌목정정(伐木丁丁)의 운치요, 찻주전자를 높이 들고 소리 높여 물을 따르는 것은 바로 산골의 폭포 소리를 가져오는 것이라 한다. 일본 예술의 인공성─그 자연을 비틀어 먹는 천박한 상징의 바탕이 여기 있구나 싶어서, 나는 미소를 머금기도 했다.

어쨌든, 나는 빈객(賓客)으로서 다완(茶碗)을 받아 좌우의 사람에게 인사하는 법에서부터 잔을 들고 마시는 법, 나중에 골동(骨董)으로서의 다완을 감상하며 주인을 추어주는 법을 배웠다─다완이 고려 자기인 경우에는 주인의 어깨가 으쓱해진다. 이 사장(師匠)이 시키는 대로 차를 권하는 주인으로서의 예의작법을 시험해 보기도 하였다.

그것뿐이다. 나는 그 다도에는 흥미가 없었고, 그 뒤에 이 다도를 스스로 행해 본 적도 없다. 그러면서도 내가 이 다실에 자주 놀러 간 것은 사장과 더불어 파한(破閑)으로 농담의 선문답을 하는 재미에서였다. 실상은 그것보다도 다실의 정적미(靜寂美)에 매료(魅了)되었다는 것이 더 적적한 것이다. 아담한 정원을 앞에 놓은 지극히 소박하고 단순한 이 다실은 무척 맑고 따뜻하였다.

미닫이는 젊은 중들이 길거리에서 주워온 종이를 표백하여 곱게 바른 것이어서 더욱 운치가 있었다. 나중에는 이 다실에 사장과 대좌해도 피차 무언의 행(行)을 하는 사이가 되었다. 이럴 때 항상 내 눈을 빼앗아 가는 것은 정원 가장귀에 놓인 작은 바위기가 일쑤었다. 나의 선은 이 이끼 앉은 바위를 바라보며 시를, 민족을, 죽음을 화두(話頭)로 삼고 있었다.

바위는 그 어떠한 문제에도 계시를 주는 성싶었다. 잔디 속에 묻혀 있는 불규칙한 징검돌은 사념의 촉수(觸手)를 어느 방향으로든 끌고 비약하였다. 이리하여, 나는 선도 다도도 아닌 돌의 미학을 자득(自得)하여 가지고 이 이방(異邦)의 절을 떠났던 것이다. 떠나던 전날 사장은 7,8명의 귀족 영양(令孃)을 불러 다회를 열고 젊은 방랑객을 전별(餞別)하였다.

그것도 이른바 인연인지 모른다. 그 1년 뒤 나는 오대산 월정사에 있는 불교 전문 강원(講院)에서 교편을 잡게 되었고, 거기서 나는 우리의 선과 우리의 돌의 진미를 맛보게 되었다. 내가 머물고 있던 월정사의 동향한 1실은 창만 열면 산이요 숲이었고, 밤이면 물소리 바람 소리가 사철 가을이었다. 여기서 보는 바위는 인공으로 다스리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암석이었다.

기골(氣骨)과 풍치가 사뭇 대륙적이요, 검푸르고 마른 이끼가 드문드문 앉은 거창한 것이어서 묘심사의 인공적이요 온아적정(溫雅寂靜)하던 돌과는 그 맛이 판이하였다. 일진의 바람을 몰고 홀연한 자세로 부동(不動)하던 그 바위의 모습은 나의 심안(心眼)의 발상을 다르게 하였다. 나는 여기서 1년 동안 차보다도 술을 마셨고, 나물만 먹는 창자에 애주무량(愛酒無量)해서 뼈만 남은 몸이 되어 내가 스스로 바위가 되어 가고 있었다. 나의 선도 상심낙사(賞心樂事)하는 화경청적(和境淸寂)의 다선(茶禪)에서 방우이목우(放牛而牧牛)하는 불기분방(不羈奔放)의 주선(酒禪)이 되고 말았다.

오대산은 동서남북 중대(中臺)에 절이 있다. 서대절은 초옥수간 잡풀이 우거진 마당에, 누우면 부처도 없는 곳에 향을 사르고 정(定)에 들어 있는 선승은 사람이 온 줄도 몰랐다. 그를 구태여 깨울 것이 없었다. 구름을 바라보고 새 소리를 들으면, 1천 7백 측 공안이 아랑곳없이 나도 그대로 현묘지경(玄妙之境)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오대산 상원사에는 방한암(方漢岩) 종정이 선연(禪筵)을 열고 있었다. 이따금 마음이 내키면 나는 그 말석(末席)에 참(參)하였다.

구름 노을 깊은 골에 / 샘물이 흐르느니
​ 우짖는 산새 소리 / 길이 다시 아득해라.
​ 일 없는 늙은 중은 / 바위 아래 잠든 것을
​ 청전백일(靑天白日)에 / 꽃잎이 흩날린다.

좌선을 쉴 때면 역시 바위를 내다보며 시를 생각하는 것이 좋았다. 바위를 내다보는 것은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우리 선방(禪房)에도 차를 마신다. 오가피차나 맥차(麥茶), 그것도 아무런 형식이 없이 아주 자유롭고 흐뭇하게 둘러앉아 농담을 나누면서 마시는 품이 까다롭지 않아서 별취(別趣)였다. 창을 열면 산이 그대로 정원이요, 소동파(蘇東坡)의 '溪聲便是廣長舌 山色豈非淸淨身(계성편시광장설 산색개비청정신) '이라는 시구 그대로 화엄(華嚴)의 세계였다. '차는 찬데 왜 , 뜨거울까'─차(茶)와 차다(冷)의 동음(同音)을 이용하여 농담선문을 나에게 던지는 노승이 있었다. 나는 웃으면서 '예, 보리찹니다'라고 대답한다. 역시 보리(麥)와 菩提(俗音 보리)의 동음을 이용한 것─이쯤 되면 농담도 선미(禪味)가 있어서 파안대소(破顔大笑)였다.

'風塵熱惱蒸三界 法雨淸凉酒五臺(풍진열뇌증삼계 법우청량주오대)'의 귀(句)로 연구(聯句)에 끼이기도 하던 월정사의 생활도 미일전쟁이 터지고 싱가포르가 함락되고 하면서부터는 숨어서 살 수 있는 암혈(岩穴)은 아니고 말았다. 과음의 나머지 나는 구멍 뚫린 괴석과 같은 추상의 육체를 이끌고 오대산을 떠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월정사는 6.25동란에 회신(灰燼)했다 한다.

내가 거처하던 동향일실(東向一室) ─방우산장(放牛山莊)도 물론 오유(烏有)로 돌아갔던 것이다. 그러나 나의 젊은 꿈이 깃든 숲 속의 그 바위는 아직도 남아 있을 것이다. 인세(人世)의 풍상에 아랑곳없는 것이 아니라, 그 풍상을 사람으로 더불어 같이 열력(閱歷)하면서 변하지 않는 데에 바위의 엄위(嚴威)와 정다움이 함께 있는 것은 아닐까?

돌에도 피가 돈다. 나는 그것을 토함산 석굴암에서 분명히 보았다. 양공(良工)의 솜씨로 다듬어 낸 그 우람한 석상의 위용은 살아 있는 법열(法悅)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인공이 아니라 숨결과 핏줄이 통하는 신라의 이상적 인간의 전형이었다.

그러나, 이 신라인의 꿈속에 살아 있던 밝고 고요하고 위엄 있고 너그러운 모습에 숨결과 핏줄이 통하게 한 것은, 이 불상을 조성한 희대의 예술가의 드높은 호흡과 경주(傾注)된 심혈이었다. 그의 마음 위에 빛이 되어 떠오른 이상인의 모습을 모델로 삼아 거대한 화강석괴(花崗石怪)를 붙안고 밤낮을 헤아림 없이 쪼아 내고 깎아 낸 끝에 탄생된 이 불상은 벌써 인도인의 사상도 모습도 아닌 신라의 꿈과 솜씨였다.

석굴암의 중앙에 진좌(鎭座)한 석가상은 내가 발견한 두 번 째의 돌이다. 선사의 돌에서 나는 동양적 예지(叡智)를 발견하였다. 그것은 지혜의 돌이었다. 그러나, 석굴암의 돌은 나에게 한국적 정감의 계시를 주었다. 그것은 예술의 돌이었다. 선사(禪寺)의 돌은 자연 그대로의 돌이었으나, 석굴암의 돌은 인공이 자연을 정련(精鍊)하여 깎고 다듬어서 오히려 자연을 연장 확대한 돌이었다.

나는 거기서 예술미와 자연미의 혼융(混融)의 극치를 보았고, 인공으로 정련된 자연, 자연에 환원된 인공이 아니면 위대한 예술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배웠다. 예술은 기술을 기초로 한다. 바탕에 있어서는 예술이나 기술이 다 다. 그러나 기술이 예술로 승화(昇華)하려면 자연을 얻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인공을 디디고서 인공을 뛰어넘어야 한다. 몸에 밴 기술을 망각하고 일거수 일투족이 무비법(無非法)이 될 때 예도(藝道)가 성립되고, 조화와 신공(神功)이 체득된다는 말이다.

나는 석굴암에서 그것을 보았던 것이다. 둘에도 피가 돈다는 것을 말이다. 나는 그 앞에서 찬탄과 황홀이 아니라 감읍(感泣)하였다. 그것이 불상이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한국 예술의 한 고전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몇 번이고 그 자비로운 입모습과 수렷이 내민 젖가슴을 우러러보았고, 풍만한 볼기 살과 넓적다리께를 얼마나 어루만졌는지 모른다.

내가 석굴암을 처음 가던 날은 양력 4월 8일 , 이미 복사꽃이 피고 버들이 푸른 철에 봄눈이 흩뿌리는 희한한 날씨였다. 눈 내리는 도화불국(桃花佛國) ─ 그 길을 걸어가며, 나는 '碧藏雲外寺 紅露雪邊春(벽장운외사 홍로설변춘)'의 즉흥 1구를 얻었다. 이 무렵은 내가 오대산에서 나와서 조선어학회의 《큰사전》편찬을 돕고 있을 때여서, 뿌리 뽑히려는 민족문화를 붙들고 늘어진 선배들을 모시고 있을 때라 슬프고 외로울 뿐 아니라, 그저 가슴 속에서 불길이 치솟고 있을 때였다.

이 때에 나는 신앙인의 성지순례와도 같은 심정으로 경주를 찾았던 것이다. 우리 안에 살아 있는 신라는 서구의 희랍 바로 그것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피가 돌고 있는 석상에서 영원한 신라의 꿈과 힘을 보고 돌아왔다.

돌에는 맹렬한 의욕, 사나운 의지가 있다. 나는 그것을 피난 때 대구에서 보았다. 왕모래 사토(沙土)길 언덕에 서 있는 집채보다 큰 바위였다. 그 옆에는 삐적 마른 소나무가 하나─송충이가 솔잎을 다 갉아먹어서 하늘을 가리울 한 점의 그늘도 지니지 못한 이 소나무는 용의 비늘을 지닌 채로 이미 상당히 늙어 있었다. 또, 그 옆에는 이 바위보다도 작은 판잣집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이 살풍경한 언덕길을 가끔 나는 석양배(夕陽盃)에 취하여 찾아오곤 하였다. 그 무렵은 부산에서 백골단 땃벌 떼가 나돌고 경찰이 국회를 포위하여 발췌 개헌안을 강제 통과시키던 소위 정치 파동이 있던 임진년 여름이다.

드물게 보는 가뭄에 균열된 논이랑에서 농부가 앙천자실(仰天自失)한 사진이 신문에 실릴 무렵이었다. 그저 목이 타서 자꾸 막걸리를 마셨지만, 술이란 원래 물이긴 해도 불기운이라서 가슴은 더욱 답답하기만 하였다. 막걸리 집에 앉아 기우문(祈雨文)을 쓴 것도 무슨 풍류만이 아니었다. 이 무렵에 나는 이 사나운 의지의 돌을 발견하였다. 이 세 번째 돌은 혁명의 돌이었다.

그 바위에는 큰 나방이가 한 마리 붙어 있었다. 나는 그것이 자꾸만 열리지 않는 돌문 앞에 매어달려 울고 있는 것으로 느껴졌다. 주먹으로 꽝꽝 두드려 보면, 그 바위는 무슨 북처럼 울리는 것도 같았다. 이 석문을 열고 들어가면 맷방석만한 해바라기 꽃송이가 우거지고 시원한 바다가 열려지는 딴 세상이 있을 것도 같았다.

나는 이 바위 앞에서 바위의 내력을 상상해 본다. '태초에 꿈틀거리던 지심의 불길에서 맹렬한 폭음과 함께 퉁겨져 나온 이 바위는 비록 겉은 식고 굳었지만, 그 속은 아직도 사나운 의욕이 꿈틀대고 있을 것이다'라고─. 그보다도 처음 놓여진 그 자리 그대로 앉아 풍우상설(風雨霜雪)에 낡아 가는 그 자체가 그지없이 높이 보였다. 바위도 놓여진 자리에 따라 사상이 한결같지 않다. 이 각박한 불모의 미가 또한 나에게 인상적이었다.

성북동은 어느 방향으로나 5분만 가면 바위와 숲이 있어서 좋다. 요즘 낙목한천(落木寒天)의 암석미를 맘껏 완상할 수 있는 나의 산보로는 번화의 가태(假態)를 벗고 미지의 진면목을 드러낸 풍성항 상념의 길이다. 나는 이 길에서 지나간 세월을 살피며, 돌의 미학, 바위의 사상사(思想史)에 침잠한다. 내가 성북동 사람이 된지 스물세 해, 그것도 같은 자리 같은 집에서고 보니, 나도 암석의 생리를 닮은 모양이다. 轉石不生苔(전석불생태)라고 구르는 돌에 이끼가 앉지 않는다는 것이 암석미의 제1장(第一章)이다 .

  1. 趙芝薰: 1920~1968. 시인, 국문학자. 경북 영양 출생. 본명 동탁(東卓). 1939년 “문장”지를 통하여 ‘고풍 의상’, ‘승무’, ‘봉황수’ 등으로 정지용의 추천을 받아 등단하였다. 동양의 회고적 정신을 바탕으로 전통에의 향수, 민족의 한(恨)을 고전적 운율로 노래하였으며, 박두진, 박목월 등과 “청록집”(1946)을 간행하였다. 시집으로 “청록집”(공저), “풀잎 단장”(1952), “역사 앞에서”(1959), “여운”(1964) 등이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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