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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그믐달 / 나도향

부흐고비 2019. 12. 29. 22:04

그믐달 / 나도향


나는 그믐달을 사랑한다. 그믐달은 요염하여 감히 손을 잡을 수도 없고 말을 붙일 수도 없이 깜찍하게 예쁜 계집 같은 달인 동시에, 가슴이 저리고 쓰린 가련한 달이다. 서산 위에 잠깐 나타났다 숨어 버리는 초생달은 세상을 후려 삼키려는 독부(毒婦)가 아니면, 철모르는 처녀 같은 달이지마는, 그믐달은 세상의 갖은 풍상을 다 겪고 나중에는 그 무슨 원한을 품고서 애처롭게 쓰러지는 원부(怨婦)와 같이 애절하고 애절한 맛이 있다. 보름에 둥근 달은 모든 영화와 끝없는 숭배를 받는 여왕과도 같은 달이지마는, 그믐달은 애인을 잃고 쫓겨남을 당한 공주와 같은 달이다.

초생달이나 보름달은 보는 이가 많지마는, 그믐달은 보는 이가 적어 그만큼 외로운 달이다. 객창(客窓) 한등에 정든 임 그리워 잠 못 들어 하는 분이나, 못 견디게 쓰린 가슴을 움켜 잡은 무슨 한 있는 사람이 아니면 그 달을 보아주는 이가 별로이 없을 것이다. 그는 고요한 꿈나라에서 평화롭게 잠들은 세상을 저주하며, 홀로이 머리를 흩뜨리고 우는 청상과 같은 달이다.

내 눈에는 초생달 빛은 따뜻한 황금빛에 날카로운 쇳소리가 나는 듯하고, 보름달은 치어다보면 하얀 얼굴이 언제든지 웃는 듯하지마는, 그믐달은 공중에서 번듯하는 날카로운 비수(匕首)와 같이 푸른빛이 있어 보인다. 내가 한이 있는 사람이 되어서 그러한지는 모르지만, 내가 그 달을 많이 보고 또 보기를 원하지만, 그 달은 한 있는 사람만 보아주는 것이 아니라, 늦게 돌아가는 술주정꾼과 노름하다 오줌 누러 나온 사람도 혹 어떤 때는 도둑놈도 보는 것이다.

어떻든지 그믐달은 가장 정 있는 사람이 보는 동시에, 또는 가장 한 있는 사람이 보아주고, 또 가장 무정한 사람이 보는 동시에 가장 무서운 사람들이 많이 보아 준다. 내가 만일 여자로 태어날 수 있다면 그믐달 같은 여자로 태어나고 싶다.

작품의 이해와 감상


나도향은 낭만주의적 성향의 작가다. 그믐달의 한에 이끌리는 것 자체가 그의 낭만성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일일 것이다. 달을 통해 지은이는 자신의 심정을 토로한다. 독부 같은 초생달 보다, 여왕 같은 보름달보다 쫓겨난 공주 같은 그믐달을 더 사랑하는 그의 정서는 나도향 개인의 것만은 아니다. 한과 애절함와 슬픔에 더욱 친근함을 느끼는 것은 우리민족 공동의 정서이며 또한 한국문학의 전통적 정조이기도 한 것이다.

이 글의 발표 연대는 1925년. 웃는 달이 아닌, 우는 달을 더 사랑했던 나도향은 이듬해 폐환으로 요절한다. 식민지시대라는 이유였을까, 나도향이 활동했던 <백조> 동인은 환상으로 도피하기를 즐기고 극단적인 낭만주의를 추구한 모임이었다. 젊은 나도향의 가슴에 맺힌 한과 아픔을, 11개의 문장으로 꾸며진 이 짤막한 작품에서 우리는 충분히 들여다볼 수 있다.

맨 첫 문장에 선명하게 주제를 담고 대조와 유추를 통해 그 이유를 하나씩 설파해나간 미려한 문체는 가히 매혹적이다. 그가 보여주는 비약과 암시 또한 빼어나다. 논리적이 아니라 정서적으로 대상을 관찰해 섬세하고 정교한 직유법들 속에 실어 놓았으니 나도향의 언어적 감수성이 번득이는 글이다.




   나도향(羅稻香, 1902∼1926)은 소설가. 본명은 경손(慶孫), 호는 도향(稻香), 필명은 빈(彬). 서울 출생. 1919년 배재고보를 졸업하고, 경성의전(京城醫專)에 입학했다가 일본으로 밀항했으나 학비가 없어 돌아왔다. 경상북도 안동에서 1년간 보통학교 교원으로 근무할 때 안동을 무대로 중편 《청춘(靑春)》을 썼으며 처녀작은 1921년 4월 《배재학보(培材學報)》 제2호에 발표한 《출학(黜學)》이다. 이듬해 문예동인지 《백조》를 발간하면서 창간호에 《젊은이의 시절》, 장편 《환희(幻戱, 1922)》 등 지나치게 감상적이고 소녀적인 작품을 썼다.

그 뒤 이러한 백조파적인 감상을 극복하고 사실적인 경향으로 전환하여 《17원 50전(1923)》 《행랑자식(1923)》 《여이발사(女理髮師, 1923)》를 《백조》에 발표하고 《물레방아(1925)》 《뽕(1925)》 《벙어리 삼룡이(1925)》 등의 작품을 발표했다. 1926년 재차 도일(渡日)하여 수학(修學)의 뜻을 이루려 했으나 26세 때 급성 폐렴으로 요절하였다.

그의 작품경향은 《추억》을 비롯하여, 사랑에 배반당하고 술에 취한 젊은이의 비련(悲戀)을 그린 《젊은이의 시절》, 마을의 부자이며 세력가의 집에서 막실(幕室)살이를 하는 젊은 내외의 삼각관계의 비극을 그린 《물레방아》, 장편 《환희》 등은 남녀 애정 중심의 낭만적 경향의 작품이었다. 그러나 그는 후기에 와서 사실주의적 경향의 작품을 써 단편 《17원 50전》을 비롯하여 제분소 여공(女工)의 생활고와 불행을 그린 단편 《자기를 찾기 전(1924)》, 노름으로 딴 아내의 남성 편력과 헤픈 정조 등을 그린 《뽕》, 일제의 질곡 하에 신음하던 당시 한국인의 비애를 그린 《벙어리 삼룡이》 등은 모두 사실주의 계열에 속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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