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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설 / 전숙희

부흐고비 2020. 1. 2. 11:34

설 / 전숙희


설이 가까와 오면, 어머니는 가족들의 새 옷을 준비하고 정초 음식 차리기를 서두르셨다. 가으내 다듬이질을 해서 곱게 매만진 명주(明紬)로 안을 받쳐 아버님의 옷을 지으시고, 색깔 고운 인조견(人造絹)을 떠다가는 우리들의 설빔을 지으셨다. 우리는 그 옆에서, 마름질하다 남은 헝겊 조각을 얻어 가지는 것이 큰 기쁨이기도 했다. 하루 종일 살림에 지친 어머니는 그래도 밤늦게까지 가는 바늘에 명주실을 꿰어 한 땀 한 땀 새 옷을 지으셨다. 우리는 눈을 비벼 가며 들여다보다가 잠이 들었다.

착한 아기 잠 잘 자는 베갯머리에
어머님이 홀로 앉아 꿰매는 바지
꿰매어도 꿰매어도 밤은 안 깊어.

잠든 아기는 어머니가 꿰매 주신 바지를 입고 산줄기를 타며 고함도 지를 것이다. 우리는 설빔을 입고 널뛰는 꿈도 꾸었다. 설빔이 끝나면 음식으로 접어든다. 역시 즐거운 광경들이었다. 어머니는 미리 장만해 둔 엿기름가루로 엿을 고고 식혜(食醯)를 마드셨다. 아궁이에서는 통장작불이 활활 타고, 쇠솥에선 커피 색 엿물이 설설 끓었다. 그러면, 이제 정말 설이구나 하는 실감(實感)으로 내 마음은 온통 아궁이의 불처럼 행복하게 타올랐다. 오래오래 달이 엿을 식혀서는 강정을 만들었다. 검은 콩은 볶고 호콩은 까고 깨도 볶아 놓았다가, 둥글둥글하게 콩강정도 만들고 깨강정도 만들었다. 소쿠리에 강정이 수북이 쌓이면서 굳으면, 어머니는 독 안에다 차곡차곡 담으셨다.

수정과(水正果)를 담그는 일도 쉽진 않다. 우선 감을 깎아 가으내 말려서 곶감을 만들어 두어야 한다. 알맞게 건조(乾燥)한 곶감은 빨갛게 투명(透明)하가까지도 하고, 혀끝에 녹는 듯한 감칠맛이 있다. 이것을 향기로운 새앙물에 띄우고, 한약방에서 구해온 계피(桂皮)를 빻아 뿌리는 것이다.

빈대떡도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다. 우선 녹두(綠豆)를 맷돌로 타서 물에 불려 거피를 내고 다시 맷돌에 곱게 갈아, 돼지고기와 배추김치도 알맞게 썰어 넣은 다음, 넉넉하게 기름을 두르고 부쳐 내는 것이다. 며칠씩 소쿠리에 담아 놓고 손님상에 내놓기도 좋거니와, 솥뚜껑에 푸짐히 부쳐 가며 온 가족이 둘러 앉아 먹는 것도 별미(別味)였다.

그러나 정초 음식의 주제(主題)는 역시 흰떡이다. 흰 쌀을 물에 담갔다가 잘 씻고 일어선 차례로 쪄내고, 앞뜰에 떡판을 놓고는 장정 두어 사람이 철컥철컥 쳤다. 장정들이 떡판을 쳐내면 어머니는 밤을 새워 떡가래를 뽑고, 알맞게 굳으면 이것을 써셨다. 그리고, 세뱃군이 오는 대로 맛있는 떡국을 끓이고, 부침개며 나물이며 강정이며 수정과며 한 상씩 차려 내셨다.

나는 지금도 설날이 되면, 어머니 옆에서 설빔이 되기를 기다리던 그 초조(焦燥)한 기쁨, 엿을 고고 강정을 만들고 수정과를 담그고 흰떡을 치던 모습, 빈대떡 부치던 냄새, 이런 흐뭇한 기억(記憶)이 되살아나 향수(鄕愁)에 잠긴다.

우리 어머니들은 설빔하나 만드는 데도, 설상 하나 차리는 대도 이처럼 수많은 절차(節次)를 거치고, 알뜰과 정성과 사라을 쏟아 가족을 돌보고 이웃을 대접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들은 어떤가?

기성복상(旣成服商)에는 항상, 맞춘 것 이상으로 척척 들어맞는 옷들이 가득 차 있으니, 언제든지 돈만 들고 나가면 당장에 몇 벌이라도 골라 입을 수 있다. 설이 돌아 와도 여자가 그의 남편이나 아이들을 위해서 밤 새워 옷을 지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식료품상(食料品商)에는 다 만든 강정이 쌓여 있고, 다 갈아 놓은 녹두도 있다. 아니, 빈대떡도 얼마든지 살 수 있다. 흰떡도 치거나 뽑을 필요 없이, 쌀만 일어 가지고 가면 금방 떡가래를 찾아 올 수 있다.

세상이 모두 기계화(機械化)되었으니, 필요한 것은 돈과 시간뿐이요, 솜씨나 노력이나 정성이나 사랑이 아니다. 참으로 편리(便利)한 세상이 되었다. 그러나, 그 '편리' 속에 짙은 향수가 겹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우리는 정작 귀한 것을 잃어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국 여성들의 그 정성과 사랑을 우리는 이어받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가족의 옷 한 가지 짓는 데도, 남편의 밥 한 그릇 마련하는 데도, 조상의 제삿상(祭祀床) 하나 치르는 데도, 이웃에 부침개 한 접시 보내는 데도, 우리 여성들은 말할 수 없는 정성과 사랑을 다 바쳤다. 옛날의 우리 의생활(衣生活)과 식생활(食生活)은 여성들의 무한한 노고(勞苦)와 인내(忍耐)를 요구하는 것이었지만, 우리 여성들은 오로지 정성과 사랑으로, 노고를 노고로, 인내를 인내로 알지 않았다. 밤새도록 시어머니의 버선볼을 박던 며느리, 손 시린 한겨울에도 찬물을 길어다 흰 빨래를 하고 풀을 먹이고 다듬이질을 하고, 희미한 호롱불 밑에서 바느질을 하던 아내와 어머니, 한국 여인들의 그 아름다운 마음씨를 누가 감히 따를 수 있을까?

오늘의 우리는 그들의 마음을 잃어 가고 있다. 마음을 잃어 가고 있으므로 생활도 잃어 간다. 아침이면 뿔뿔이 헤어지고, 저녁에 모여선 빵과 통조림으로 끼니를 때우고, 텔레비전 앞에서 대화(對話) 없는 몇 시간을 지나다간 또 뿔뿔이 헤어져 잠자리에 드는 사람도 많다. 편리하자만 참생활이 없다. 그래서, 현대인은 고독(孤獨)한지도 모른다.

우리가 어려서 우리 어머니들에게서 느끼던 그 '어머니'를 오늘의 우리가 우리 아이들에게 느끼게 하지를 못한다. 사서 입히고 사서 먹이는 동안에 우리는 정성과 사랑이 식어 간 것이다. 뼈저린 고생이 없는 대신, 그 뒤에 오는 샘물 같은 기쁨도 없어졌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은 고독하게 자라는지도 모른다. '편리'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뜨겁게 사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새삼스럽게 옛날로 돌아가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 여성들이 보여 준 그 정성과 사랑의 며느리, 아내, 어머니의 마음만은 이어받자는 것이다. 아무리 기계화된 생활이라 할지라도 정성과 사랑은 쏟을 데가 있을 것이다. 이야말로 삭막(索漠)해져 가는 우리의 생활을 인간다운 것으로 되돌리며, 현대인의 고독을 치유(治癒)하는 길이리라. 아니, 이렇게 거창하게 말할 필요까지도 없다. 나의 남편과 아이들로 하여금, 고독을 모르는 기쁜 생활을, 행복을 누리게 하는 길이라고 믿자.


명절이 돌아오면 나의 고독한 눈에, 어머니가, 어머니가 자꾸만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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