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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어머님의 나신 / 한정미

부흐고비 2020. 1. 13. 16:57

어머님의 나신 / 한정미


뿌예진 거울을 쓱 닦는다. 자욱한 김이 서린 욕실 한편에 수줍은 듯 웅크린 어머님이 거울 안으로 들어온다. 여기저기에 핀 검버섯은 아흔을 넘긴 세월의 흔적이다. 어머님은 조그만 몸을 며느리에게 맡긴다. 나 혼자서 감당하는 건 처음이라 손끝에 힘이 들어간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양처럼 어머님은 물끄러미 나를 올려다본다. 머리부터 시작이다. 다소곳이 앉은 어머님은 두 손을 모은 채 고개를 숙인다. 세월의 풍파로 깎여 왜소해진 육신. 잊혀 지지 않는 것들은 모두 슬픈 빛깔을 띤다.

오그라든 육신이 유난히 아프게 다가온다. 조금씩 인이 빠져나간 정신도 오락가락하신다. 머리에 샴푸를 하자 거품이 난다. 나에게 온전히 몸을 맡긴 어머님은 얼굴로 거품이 흘러내려도 아무런 말이 없다. 성성한 머리카락 사이로 인고의 세월이 빠져나온다. 어머님은 열여섯 꽃다운 나이에 고개를 넘어 시집을 왔다. 자식 아홉을 낳아 셋을 가슴에 묻었다. 처음 자식을 잃었을 땐 가마때기에 쌓여 윗목에 놓여있는 아이를 아랫목으로 데려와 쓰다듬고 또 쓰다듬었다.

가슴에 자식을 묻으며 다시 살아나기를 간절히 염원하며 애통해했다. 그게 한이 되었을까. 먹고 살기 어려운 시절 어머님은 자식들 열 살이 될 때까지 매년 생일에 팥수수떡을 해서 먹였다 한다. 액운을 물리치기 위함이었다. 더 이상 자식을 잃고 싶지 않아서 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렁그렁한 눈으로 전하던 시누이의 말이 생각나 내 눈에도 눈물이 맺힌다. 다음은 가슴이다. 말라서 여인의 가슴이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절벽이 된 젖가슴. 자식 아홉에게 물린 젖이니 제 모습이 남아있을 리 없다.

자식 셋을 가슴에 묻고 아린 가슴을 감추고 싶었는지 일에만 매달렸다. 아이를 낳고도 산후조리는 언감생심 꿈도 못 꾸고 며칠 몸을 추스르면 바로 일을 하러 나갔다. 젖이 돌아 흘러넘쳐도 집에 두고 온 아이는 뒷전이었다. 치마끈으로 가슴을 칭칭 동여매었지만 어느 새 저고리의 앞섶은 젖어들었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아이는 울다 지쳐 잠들어 있었다. 그렇다고 곧바로 젖을 물리진 못했다. 저녁준비를 해야 했다. 저녁상을 차려놓고서야 젖을 물리며 아이의 눈가에 말라버린 눈물을 닦아주었다.

어미의 그 심정을 어찌 헤아릴 수 있을까. 다시 비누칠을 한다. 이번에는 손과 팔을 씻어 드린다. 손가락이 앙상하다. 수액이 다 빠져나간 겨울나무처럼 버석거린다. 이 손으로 자식 여섯을 키웠다. 층층시하의 어른을 모셨고 시누이 시동생들을 모두 출가시켰다. 거뭇거뭇 검버섯들이 지난 기억들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 요즘 어머님은 잠결에 허공으로 손을 내저으며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내곤 했다. 인기척에 건너가 손을 잡아 드리면 그제야 다시 잠이 들었다. 무엇을 잡고 싶은 것일까.

요즘 기력이 떨어져 집안에서만 머무는 시간이 대부분이다. 기억도 차츰 흐려지고 있다. 가슴에 묻은 세 자식을 잡고 싶은 걸까. 버팀목이 되지 못했던 아버님의 옷자락이라도 잡고 싶은 걸까. 어미였기에 누구보다 강했지만 연약한 여자의 몸부림일까. 자주 손을 내저으며 무언가를 잡으려고 한다. 제아무리 정이 깊어도 생채기 난 어머님의 마음을 모두 헤아릴 수는 없다. 다음은 고된 길을 걸어 온 발과 다리를 씻는다. 어머님의 발은 유난히 작다. 가슴이 쓰라려온다. 걷는 게 고통일 정도의 아픈 다리는 깡말라있다.

이 작고 마른 발과 다리로 어찌 그 험한 세월을 건너왔을까. 종갓집 맏며느리로 지내온 어머님의 생활은 호락호락하지가 않았다. 새벽에 일어나 시할아버님 세숫물부터 준비해드리는 게 하루의 시작이었다. 그뿐 아니라 시동생과 시누이들의 수발도 어머님의 몫이었다. 일 년 동안 열세 번의 제사와 학교들 다녔던 어린 시동생과 시누이의 도시락도 당연한 차지였다. 도시락 반찬이 마음에 안 든다고 떼를 쓰는 아침이면 하루는 더 바빠졌다. 아버님은 구름이고 바람이었다.

아침댓바람에 흰 두루마기를 말끔히 차려입고 나선 걸음은 해가 어슴푸레 넘어가면 돌아왔다. 때로는 술이 한 잔 거나해져 돌아오기도 했다. 고개 너머 다른 여자를 두었다는 소식도 바람을 타고 날아왔다. 어머님은 구태여 확인하려 하지 않았다. 애시 당초 아버님은 어머님의 울타리가 되지 못했다. 어머님은 힘들다는 내색 한 번 하지 않았다. 오로지 당신의 몫이며 자리라고 생각했다. 행주치마는 마를 날이 없었다.

밭 한 모퉁이에 앉아 친정이 있는 하늘을 보며 크게 한 번 한숨짓는 게 고작이었다. 평생 당신을 위해 해본 것이 없다. 좋은 걸 좋다고 하기보다는 늘 싫다고 했다. 당신보다는 늘 자식이 먼저였다. 뒤를 돌아 등을 닦아 드린다. 등이 굽어 있다. 얼마나 삶의 무게가 무거웠을지 짐작이 간다. 이 등을 편안히 한 번 뉘어 본 적도 없을 터이다. 종가의 종부로 업어 키운 자식들의 무게가 느껴진다. 딸을 내리 낳고 첫 아들을 본 후에야 종부로 인정을 받았다는 어머님의 말씀에는 늘 물기가 묻어있었다. 숨쉬기조차 힘에 겨우면 부엌 한 구석에 앉아 시할아버님이 먹다 남긴 막걸리를 들이켰다.

손가락으로 막걸리를 휘휘 저으며 눈물을 삼켰다. 목욕이 끝나고 어머님의 몸을 헹군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조심조심 아홉 자식을 물린 젖가슴과 굵어진 허리를 수건으로 닦아드린다. 물기가 사라지자 어머님이 순간 몸을 움츠린다. 아직 수줍음이 남아있다. 앙상한 팔과 다리 처져있는 가슴 굽어진 허리 두세 겹 접혀있는 뱃살 온몸 여기저기에는 검버섯이 피어있다. 고단하게 살아온 여자의 생을 조금이나마 닦아드리고 싶어서 나의 손에 자꾸 힘이 가해진다. 나는 지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신을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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