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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발걸음을 멈췄다 / 한정미

부흐고비 2020. 1. 13. 17:10

발걸음을 멈췄다 / 한정미


결국 멈춰 섰다. 더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슬금슬금 뒷걸음질치자니 민망했다. 망설임 끝에 골목 샛길로 들어가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갔다. 숨죽여 다가가는 나의 발걸음 소리에 할머니가 뒤돌아봤다.

약속시간보다 늦어져 지하철을 내리자마자 종종걸음을 쳤다. 앞만 쳐다보며 정신없이 가고 있는데, 계단 끝에 어렴풋한 그림자 하나가 걸쳐졌다. 누군가 구걸하고 있었다. 이 일을 어쩌나, 순간적으로 망설여졌다.

몇 해 전, 바쁜 출근 시간이었다. 며칠 보이지 않았던 구걸하는 사람이 보였다. 급한 마음에 가방 속의 지갑을 꺼내려다 지나가는 옆 사람과 팔이 딱 부딪혔다.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구걸하는 사람 앞의 빈 바구니에 돈을 넣었다. 그때였다.

"뭐야, 생색내는 거야? 바쁜 출근 시간에 팔이나 부딪히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지만, 내 귀에는 너무나도 선명히 들렸다. 나는 선 자리에서 꼼짝없이 얼어버렸다. 눈앞의 세상이 뿌옇게 흐려지더니 그대로 정지해버렸다. 그 뒤부터 나는 돌아가더라도 구걸하는 사람을 피해 다녔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럴 수 없었다. 계단이 거의 끝나갈 무렵 딱 마주친 거였다. 할머니 한 분이 지팡이에 의지한 채 간신히 서 있었다. 애써 눈길조차 주지 않고 지나쳤는데, 할머니의 약하고 떨리는 목소리가 나의 등 뒤에 따라 붙었다.

"라면 한 봉지 천원이예요."

어렴풋이나마 손에 무언가 들고 있어 보였는데 라면인 모양이었다. 그 소리에 고개를 돌리기에는 나의 걸음은 이미 두서너 발자국 앞서 있었다.

'어쩌나? 되돌아가야 하나?' 짧은 순간에 많은 생각이 스쳐갔다. 결국 나는 발걸음을 멈췄다. 아직 목에 가시처럼 걸려 있는 어릴 때의 일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초등학교 2학년 봄 소풍 때 점심시간이었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도시락을 먹으러 모였다. 반 친구들은 각자 엄마가 싸준 도시락을 펼쳐 맛있게 먹었다. 그런데 무리에 끼지 못하고 한구석에 혼자 앉아 있는 아이가 있었다. 평상시에도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아이였다.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그 아이가 슬그머니 친구들 주변으로 오더니 뭐라고 말을 붙이는 모습이 보였다. 친구들은 하나같이 들은 체 만 체 했다. 조금씩 내 곁으로 다가오자 어찌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 못했었다.

그 아이에게는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냄새가 나서 친구들이 꺼렸었다. 지극히 소심했던 나는 친구들과 다르게 행동하는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늘 그 아이에게 시선이 갔지만 애써 외면했었다.

급기야 아이는 나에게 다가와 물 한 모금 줄 수 있냐며 말을 건넸다. 손에는 먹다 남은 삶은 달걀노른자 반쪽이 들려 있었다. 내 손은 이미 물통에 가 있으면서도 고개를 돌려 버렸다. 아이는 힘없이 몸을 돌리더니 급기야 토해 버렸다. 옆에 있던 나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여기서 내 기억은 딱 멈춰 버렸다. 뒤에 어찌 되었는지 숱하게 기억해보려 애썼지만 통 떠오르지 않았다. 몸집이 작았던 나는 친구들과 다른 행동을 하면 그 아이처럼 외톨이가 되는 게 두려웠었다. 늘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아이에게 다가가고픈 마음은 굴뚝이었다. 친구들 시선이 두려워 물 한 모금 건네지 못한 것이 아직 목에 걸려 있다. 지금까지도 나는 삶은 달걀노른자를 먹지 못하고 있다.

할머니는 절뚝거리며 나에게 다가왔다. 들고 있는 라면 한 봉지가 천 원이라며 내밀었다. 나는 지갑에서 돈을 꺼내어 할머니에게 전했다. 라면은 받지 않고 돌아서려니 나의 팔을 꽉 잡았다.

"라면 가져가야지요."

할머니는 시중보다 차이나는 금액으로 살아가고 있으니 이해해 달라는 말을 덧붙였다. 지레짐작으로 라면은 받지 않고 돌아섰던 나의 얄팍한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할머니는 남루한 옷차림에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고 있었지만, 허리를 곧추세우려 애쓰고 있었다.

나는 얼른 라면을 받아 가방에 넣었다. 몇 걸음 가다 뒤를 돌아보았다. 아직도 목에 걸려 있었던 가시가 조금 내려가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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