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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밥 / 한정미

부흐고비 2020. 1. 13. 17:03

밥 / 한정미


휴일 아침이다. 오랜만에 가지는 느긋함으로 작은 가마솥에 밥을 짓는다. 쳇바퀴 도는 평일에는 엄두를 내지 못하는 일이다. 밥물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불을 줄이자 부글거림이 잦아든다. 밥물이 잘박해지면 물을 다시 끼얹는다.

어렸을 적 어머니는 우리에게 항상 따뜻한 밥을 제때 해 먹이려 애썼다. 이른 새벽에 달그락 거리며 쌀을 씻는 소리에 나는 눈을 떴다. 살짝 문을 열어 본 어머니의 뒷모습은 아직도 기억에 또렷이 남아 있다. 또 남기지 않을 만큼 밥을 했다. 어린 나는 정말 신기했다.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어머니의 손은 어느 저울보다 정확했다.

그때는 지금처럼 전기밥솥이 흔하지 않았다. 연탄불에 밥이 다 될 때까지 어머니는 곁을 떠나지 않았다. 겨울에는 불 옆에 있으니 따뜻해 보이기도 했으나, 여름에는 미련스러워 보였다. 한 끼 정도는 넉넉히 해서 광주리에 담아 서늘한 곳에 담아 두어도 될 터인데 더위를 고스란히 온몸으로 받았다.

겨울에는 늦게 들어오는 아버지의 밥그릇이 늘 아랫목을 차지했다. 식을세라 이불을 몇 겹이나 둘렀다. 우리 남매들이 추워서 아랫목 이불 속에 발을 넣으려면 밥이 식는다고 야단을 쳤다 우리는 엄마의 눈을 피해가며 잠깐씩 이불 속에 발을 넣었다. 그러다 발에 아버지 밥그릇이 닿으면 화풀이라도 하듯 툭 건드렸다.

부엌 연탄불 위에는 집게를 걸쳐 국 냄비를 올려놓았다. 언제든 들어오면 바로 따뜻한 밥상을 내놓는 게 어머니의 사명인 것 같았다. 연탄불 위의 국은 자꾸 졸아들었다. 어머니는 방문 앞에 앉아 물려오는 잠을 쫓아내며, 대문 밖 바람 소리에도 문을 열어 누구의 걸음인가를 확인했다. 나는 어머니의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없었다.

다시 끼얹은 물이 줄어들자 불을 아주 약하게 한다. 밥 내음이 집안에 살포시 퍼진다. 우리 아이들은 이 냄새가 참 좋다고 한다. 아마도 잠결에 흐뭇한 미소를 머금고 있지 않을까?

나도 엄마가 되었다. 딸은 어머니를 닮는다고 했다. 항상 따뜻한 밥을 먹어야 한다는 어머니의 모습을 그대로 하고 있다. 연탄불과 전기밥솥을 어찌 견줄 수 있겠냐마는, 나는 밥솥의 편리한 예약기능을 사용하지 않는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제시간에 쌀을 씻어 밥을 한다.

자식을 낳아 길러보니 내 손으로 때맞추어 밥을 해서 먹이고 싶은 어머니의 마음을 알게 되었다. 한톨 한톨 씻는 쌀눈에 남편과 아이들의 하루하루가 묻어난다.

남편의 명예퇴직으로 어깨가 작아졌다. 올망졸망한 아이들이 눈에 밟혀 선뜻 내지 못했던 사직서를 내고 왔을 때, 그는 수저를 들지 못했다. 한동안 그의 식욕은 바닥을 헤매었지만, 나는 변함없이 쌀을 씻어 밥을 하여 내밀었다. 늘 당당하고 버팀목이었던 그의 축 처진 어깨를 세우고 싶었다. 간신히 몇 숟갈 들고 나가는 뒷모습에 눈이 흐려졌다.

입시 스트레스를 유난히 받았던 딸은 날카로웠다. 손끝이라도 닿으면 베일 듯한 기세였다. 등교하고 나면 방안 책상 위에 여기저기 흩어진 책들이 딸의 마음인 것 같았다. 하나하나 가지런히 정리하며, 작은 여유라도 찾을 수 있도록 마음을 담아 밥을 지었다. 집으로 돌아 온 딸은 아무 말 없이 숟가락을 들었다.

세심한 성격에 쉬이 상처받는 큰 아들은 입안이 가끔 헐었다. 딸과 작은 아들과는 달리 스스로 제 할 일을 찾아 잘하기에 나의 관심밖에 벗어난 제 아들에게는 상처가 되었다. 입안이 헐고서 밥을 잘 먹지 못해서야 나의 눈에 들어왔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어디 있겠냐마는 나의 무심함이 미안했다. 상처를 입은 입안이 아물도록 마음을 담아 변함없이 밥을 지었다.

마음과 달리 무뚝뚝한 작은 아들은 자주 오해를 샀다. 그로 인해 친구들과의 갈등으로 학교에서 선생님의 호출을 받았다. 나는 조마조마한 걸음으로 간 학교에서 아들의 눈에 그렁그렁 맺힌 눈물을 보았다. 차라리 뚝 흘러내렸으면 큰 소리로 호통이나 한바탕 치려고 했었다. 마음과 달리 오해로 아파하는 아들의 그렁그렁한 눈물이 내 마음에 맺혔다.

묵묵히 쌀을 씻어 밥을 지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따뜻한 밥을 짓는 일이었다. 바람에 흔들릴지라도 중심을 잃지 않도록 짓는 밥에 간절한 마음을 담았다. 때로는 나의 눈물이 섞이기도 했다.

나는 거친 바람이 휘몰아치는 한가운데서도 중심을 잃지 않으려 했다. 밥물의 부글거림이 시간이 지나면 잦아들듯, 바람이 조금씩 약해졌다.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는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 매일 밥을 지었다.

우리 어머니도 이런 마음이었을까? 술을 좋아하는 아버지의 늦은 귀가를 기다리면서 아랫목에 묻어 놓은 밥을 다독였다. 올망졸망한 우리 네 남매의 눈망울을 보면서 가벼운 주머니가 미안했을 터이다. 그랬기에 어머니는 매끼 따뜻한 밥을 지었다. 한톨 한톨에 어머니의 정성을 담았을 것이다.

사는 게 녹록치 않아 술을 즐겨 했던 아버지에게 잔소리 대신으로, 넉넉지 않은 주머니를 어머니의 손길로 가득 채우고 싶었던 마음이었다. 왜 그리 미련스럽게 그러느냐는 나의 볼멘소리에 어머니는 그저 웃기만 했다. 그건 아버지의 건강과 우리 네 남매가 탈 없이 잘 자라기를 바라는 어머니만의 기도였으리라.

밥이 알맞게 뜸이 들어간다. 노릇한 누룽지 냄새가 난다. 불을 끄고 잠시 식힌 후, 솥과 누룽지 사이에 주걱을 넣어 조심히 떼어낸다. 솥 모양의 누룽지가 동그라니 식탁 위에 자리한다. 가족들을 깨우러 일어난다.

“아그들아 밥 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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