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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징검다리 / 고경숙

부흐고비 2020. 2. 13. 04:16

징검다리 / 고경숙
제12회 신라문학대상


미루나무가 우뚝 선 강 어디에도 힘차게 흐르던 강물은 보이지 않는다. 작열하는 태양은 엷은 물안개를 골마다 피워올리고 있을 뿐 바람 한 점 없는 후덥지근한 날씨다. 수심 얕은 바닥에 돌덩이들이 듬성듬성 놓여 있다. 물에 반쯤 잠긴 채로 너스레를 치는 까까머리 조무래기들마냥 삐뚤삐뿔 줄을 짓고 엉거주춤 엎드려 있는 모양이 마치 유년의 말타기 놀이를 보는 것 같아 웃음이 절로 난다. 가볍게 등짝에 올라타는 시늉으로 발걸음을 내딛자 이내 무거운 듯 꿈틀거립니다. 징검다리다. 아무 곳에서나 볼 수 없는 물레방아처럼 정겨운 이 징검다리는 돌로써 만든 다리다. 어느 이름난 석공이 정으로 쪼아 다듬어 깎아 세운 날씬한 다리가 아니다. 그저 단순하게 막돌을 쌓거나 크고 작은 바윗덩이를 강물에 띄워 놓았을 뿐이다. 그것은 물 속에 빠지지 않을 만큼 야무지고 튼실하다. 어지간한 큰물이 져도 떠내려가지 않는다. 한 번씩 순박한 민초의 마음으로 돌아가 한가로운 구름 떼며 달빛을 기다리는 망부석이 되어 강물에 몸을 섞기도 하는 그런 자연의 다리다.

친구가 강물을 향해 돌을 던진다. 물수제비라도 뜯는 것일까. 아니면 '첨벙' 외마디 소리를 내며 잠적하는 돌의 외침을 보고 싶었을까. 하얀 물살이 튀어 오르며 둥글게 파문을 그리자 팽팽하던 침묵이 일순간 때어진다. 둥글고, 모나고, 길쭉하고, 매끄럽고, 거친 생김새로 저마다 세월을 나는 돌멩이들, 그 돌멩이들을 불끈 쥐었다가 미련없이 버리는 사이 시간은 손살같이 흘렀고, 우리는 그 시간 속으로 빠르게 함몰되어 갈 것이다. 아마도 친구는 잃어버린 세월을 물빛 무늬로 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사리꽃이 핀 기도원을 지나자 엉겅퀴가 강물을 굽어보고 있다. 문득 사방이 초록 물결로 에워싼 인적 없는 이 골짜기가 공동空同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 젖어든다. 나른한 침묵의 무게를 아프게 감당하면서 나 또한 한 덩어리의 견고한 침묵이 된다. 고요를 시샘하는 새소리가 요란하다. 후미진 곳을 택해 무리지어 핀 싸리꽃의 흰 외로움이며, 홍자색 엉겅퀴 꽃잎이 가시로 날 선 까닭을 조금은 알 것도 같다. 그리고 강이 일부러 소리를 내며 징검다리를 찾아 부대기는 것도 제 쓸쓸한 몸부림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켜켜이 암벽으로 둘러싸인 상류 쪽에는 바위가 많았다. 물살에 닳아 표면이 미끈한 바위틈 사이로 물소리가 콸콸 거침없이 쏟아진다. 그 광경은 마치 물거품으로 변한 물소리가 시간의 바퀴를 구르며 원시의 날들로 회귀하려는 강의 몸부림인 듯 여겨졌다. 제법 센 물살 속에 천연의 징검다리를 이루고 있는 바위 틈서리를 건너려고 몇 번을 기웃거리다 결국 아랫쪽에 있는 콘크리트 다리로 건너서 왔다.

넙적한 암반에 공룡 발자국 화석이 띄엄띄엄 나 있다. 발자취를 따라가며 움푹 패인 발자국에 내 발자국을 포개어 본다. 시공을 넘나들며 제 삶의 무게만큼씩 깊어진 보금자리로 돌아가는 발걸음들이 변하지 않는 세월을 주제로 한 조각품인 듯하다. 작품 속에는 종적을 감춘 공룡들이 어슬렁거리며 몰려다닌다. 강물에도 씻기지 않는 발자국처럼 나의 존재를 각인시켜 줄 그 누구도 없음에 막막해진다. 험난한 세월에 할퀴고 부대낀 흔적들이 겹겹이 퇴적층을 이루고 있다. 그것은 시간의 간극間隙인 양 조밀하고 섬세하다.

천전리 암각화다. 신라 화랑들이 호연지기를 기르던 장소다. 심산유곡을 찾아 체력을 연마하고 무예를 닦아 훗날 삼국을 통일하는데 원동력이 되었다고 한다. 암벽에는 기하학적이며 추상적인 글씨와 그림들이 새겨져 있다. 오랜 풍화로 유적은 훼손된 부분이 많았지만 동물이며 사람의 모습은 희미하게 남아 꿈틀거리는 듯하다. 세모 네모 마름모골의 상형문자도 널브러진 그림자만큼이나 다채롭다. 물결무늬가 그려진 하단에는 화랑의 이름으로 보이는 명문들이 음각되어 소용돌이치던 그 시대의 격랑을 말해준다. 도도히 흐르는 강물처럼 역동적 삶을 살다간 그 누군가가 바위 속에 고단한 행적을 꼼꼼하게 기록해 놓았을지도 알 수 없다.

빛바랜 가계부마냥 옛사람들의 흔적이 낯설지가 않다. 뜻밖에 암각화가 거대한 아파트 같다는 생각이 든다. 콘크리트 틈새에 층층이 계단을 짓고 살아가는 삭막한 현대인들, 저마다 다른 삶을 오늘이라는 공간에 새기며 의미를 캐내고 있으리라. 뜻 모를 글자 속에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의 함성이 들려 오면서 어느새 바위에 따스한 체온이 스며들고 있다.

소멸의 시간에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저 암각화 뿐이리라. 바위와 문자로 결합된 그것은 과거와 현재, 미래로 나아가는 교량이다. 그 안에서 공룡의 발자국도 우리 삶도 모두 하나의 흔적으로서 스러지지 않는 발자취로 남을 것이다. 무심히 흐르는 강물도 산의 초록도 머지않아 우리들 곁에서 사라질 터, 영원을 꿈꾸는 것은 이젠 아무 것도 없다. 그하지만 저 공룡발자국만은 정지된 시간으로 남아 과거를 조명하고 현재를 기록하고 미래를 설계할 것이다. 그리하여 무기질의 바윗덩이가 생명을 얻어 불멸의 시간으로 거듭 태어나면서 암각화는 비로소 생명력을 되찾을 것이다. 그렇다면 저 온전한 화석이야말로 역사의 징검다리가 아니겠는가.

흐르는 강물 속 가공되지 않는 원석과도 같은 사진 한 장! 징검다리는 욕심을 버리고 자연의 순리와 겸허함으로 세상을 보라고 일러준다. 그리고 일보일례一步一禮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라고 한다. 서로에게 징검다리가 될 수 있는 삶은 행복하다.

친구가 바위에서 낮잠을 즐기고 있다.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가 그의 단잠 속으로 떠밀려 간다. 그는 내게 징검다리만큼이나 편안한 사람이다. 오늘처럼 아주 가끔씩 만나도 숨겨 둔 가슴속 이야기를 모두 쏟아낼 수가 있고 등을 기대면 제 아픔인 양 다독거리는 부드러운 손길이 좋다. 오늘도 나는 세상을 보기 위한 징검다리로 그를 찾은 것이다. 암각화가 먼 미래로 나아가듯이 그렇게 또 우리들의 삶은 계속된다. 내 발자국도 어느 사이 징검다리를 건넌다. 삶의 징검다리다.

오월은 계절의 여왕답게 찬란하고, 칠월은 여름의 절정이라 떠들썩하다. 그러나 유월은 있는 듯 없는 듯, 보일 듯 말 뜻 차분하고 조용한 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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