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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떨어져도 봄은 그대로 / 김태길1


좋은 글은 읽는 이에게 감동을 준다. 글재주와 짜임새에 있어서 나무랄 곳이 없더라도, 감동을 주지 못한다면 좋은 글이 아니다.

글이 감동을 주는 요인에는 여러 가지 경우가 있다. 표현의 절묘함이 감동을 주기도 하고, 작품 속을 흐르는 정서가 감동을 일으키기도 하며, 세상을 보는 작가의 안목이 감동을 부르기도 한다.

한당(閑堂)의 수필 <봄을 보내며>는 특별히 문장이 아름다운 것도 아니고 그 가운데 깊은 정서가 흐르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이 감명 깊게 읽히는 것은, 그 가운데 심오한 삶의 지혜가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한당은 이 작품에서 청(淸)대 말기의 중국학자 유월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유월이 과거에 응시했을 때 ‘꽃은 떨어져도 봄은 그대로 있다(花落春仍在)’로 시작되는 오언시를 지어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는 이야기다.

유월은 벼슬길에 오른 지 오래지 않아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파직을 당했다. 소주와 항주 등지의 서원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며 고전 연구에 몰두한 결과 백 가지를 헤아리는 많은 저서를 냈다.

그러다가 나이 70세가 넘어서 왕념손과 왕인지 부자의 학문에 심취하게 되어, 그때까지의 자기의 연구가 방법론 적으로 큰 결함을 안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유월은 왕씨 부자의 방법을 따라서 학문연구를 다시 시작하기에는 자기가 너무 늙었다고 한탄해 마지않았다. 이 정경을 목격한 그의 친구 한 사람이 ‘꽃은 떨어져도 봄은 그대로 있다’는 유월 자신의 시를 상기하라고 일렀다. 이 말에 용기를 얻어서 유월은 학문 연구의 새 출발을 하였고, 15년 동안 각고면려하여 후세에 남을 큰 업적을 쌓기에 성공하였다.

한당이 소개한 유월의 이야기는 이젠 너무 늙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큰 용기를 준다. 고희를 넘어서 새로 시작한 일이 큰 열매를 얻었다는 선례가 있다는 사실은 노년에게도 크나큰 가능성이 남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월의 일화를 통하여 용기를 얻을 수 있는 것은 비단 노년층만이 아니다. ‘꽃은 떨어져도 봄은 그대로 있다’는 시구의 정신을 넓게 해석할 때, 실의에 빠진 모든 사람들은 새 출발의 가능성이 누구에게나 항상 존재한다는 원리를 깨달을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누구나 한두 번은 실패 또는 역경에 부딪혀 심한 좌절에 빠지는 경험을 갖는다.

그러나 아무리 큰 실패를 하고 아무리 어려운 역경에 처한다 하더라도 크게 볼 때 세상은 여전히 그대로 있다. 꽃이 떨어져도 봄은 그대로 있듯이, 내가 한 번 실패해도 세상은 거기 그대로 있다.

입학시험에서 낙방의 고배를 마시거나 사업에 실패를 하거나 또는 그 밖의 어떤 역경에 처했을 때, 우리는 세상 전체가 온통 달라진 것처럼 느끼기 쉽다. 그러나 하늘과 땅은 그대로 있으며, 우주를 다스리는 유구한 이법과 인간 세계를 다스리는 역사의 법칙도 여전히 그대로 있다. 실패한 뒤에도 다시 딛고 일어설 수 있는 지반은 그대로 여전한 것이다.

일본의 제3고등학교 기숙사 노래에 ‘봄이 감을 슬퍼하는 노래(行春哀歌)’라는 것이 있었다. 당시의 일본의 고등학교는 5년제 중학교를 마치고 들어가는 3년제 학교였으니, 지금으로 말하면 대학 교양과정에 가깝다. 고등학생까지는 젊음과 낭만을 구가하고 대학생이 되면 어른으로서 행세하는 것이 그 시절의 풍속이었다. 따라서 고등학교를 졸업한다는 것은 젊음의 막이 내린다는 뜻으로도 해석되어, 제삼고등학교생들이 졸업 때 즐겨 부른 노래가 ‘봄이 감을 슬퍼하는 노래’였다.

‘봄이 감을 슬퍼하는 노래’는 그 노랫말이 구성져서 명 가곡의 하나로 손꼽혔고 나도 한때 즐겨 불렀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니 그것은 좋은 노래가 아니다. 이십 대에 벌써 봄이 사라짐을 노래한다는 것은 젊은이의 기상이 아니다. 젊은이뿐만 아니라 어떤 연령층을 위해서도 그런 노래는 좋은 노래가 아니다. 사람의 힘을 꺾는 노래는 비록 귀에 아름답게 들려도 좋은 노래가 아니다.

  1. 金泰吉: (1920년 11월 15일 ~ 2009년 5월 27일)은 대한민국의 수필가이다. 충청북도 충주에서 태어났으며, 1945년 도쿄 대학교 법학부를 중퇴하고, 1947년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다. 1960년 존스 홉킨스 대학교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도의문화저작상을 수상했으며, 서울대학교 교수, 철학연구회 회장, 대한민국학술원 회장 등을 지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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