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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뒷모습 / 김태길

부흐고비 2023. 4. 20. 14:39

뒷모습 / 김태길

“너는 숫기가 없어서 탈이다.”

이런 말을 자주 들으면서 컸다. 사내자식이 숫기가 없으니 아무짝에도 못쓰겠다고 아버지는 걱정을 하셨다. ‘숫기’가 무엇인지 잘을 몰랐지만, 죄우간 남자에게는 꼭 필요한 것인데, 그것이 나에겐 없는 모양이었다.

남의 시선과 정면에서 마주친다는 것은 늘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이었다. 시골의 가난한 어린이들은 그것도 놀이라고 ‘눈目싸움’이라는 것을 자주했거니와, 나에게는 그 도전이 은근히 걱정스러운 위협이었다.

남자의 시선보다도 여자의 시선은 더 부담스러웠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감당하가 어려운 것은 예쁘고 동백기름 냄새 그윽한 누나들의 시선이었다. 무섭지는 않은데 공연히 고개를 들기가 어려웠다.

남의 얼굴을 정면에서 바라보지 못하던 한심한 버릇은 나이가 든 뒤에도 고쳐지지 않았으며, 대수롭지 않은 것같이 보이기 쉬운 이 버릇으로 말미암아 나는 본의 아닌 오해를 자주 받았다. 일단 인사를 한 사람은 다음에 만났을 때 척 알아보아야 예절에 맞는 것인데, 나는 그것이 잘 안 되기 때문에 교만한 자라는 오해를 받기가 쉬운 것이다.

사람을 대하면 늘 고개를 숙이는 버릇이 있으므로, 내 시선은 자연히 상대편의 하의나 신발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같은 사람은 언제나 같은 옷과 같은 신을 애용한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놀라운 경제 성장 덕분으로 메일같이 갈아입고 갈아 신는 것이 요즈음의 풍속이다. 그러므로 나는 항상 새 사람을 만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곤 한다.

숫기가 좋아서 남의 얼굴을 뜯어보기에 아무런 어려움도 느끼지 않는 어떤 친구의 솔직한 고백을 들은 적이 있다. 그는 아름다운 여자들의 매력적인 모습을 감상하는 취미를 체득하게 되었고, 그 취미 덕분으로 적지 않은 위안을 느껴가며 세상을 살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어떠한 자연보다도 아름답고 누구의 예술품보다도 뛰어난 여자의 자태를 황홀히 바라보는 순간, 속세의 시름을 잊고 삶의 의미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고 그는 말하였다. 그리고 여자에게는 깡패가 없으므로 왜 쳐다보느냐고 시비를 걸어올 염려도 없을 뿐 아니라, 분노를 느끼는 법이라고 덧붙였다.

그 친구가 그의 은밀한 취미를 귀띔해 준 것은 세상을 무미하게 살아가는 나에 대한 뜨거운 우정의 표시였다. 그의 낭만적인 취미를 나도 본받으라는 충고였다. 남의 얼굴을 감상하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 예절에 맞는 것이냐 하는 도학자적 문제에 앞서서 내 숫기 가지고는 감불생심 그럴 수가 없었으니, 모처럼 우정 어린 그의 가르침도 나에게는 한갓 탁상공론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해괴한 버릇이 하나가 새로이 생기고 있었다. 길을 걸으며 여지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버릇이니, 아마 그 친구의 충고가 삐뚜루 작용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 친구의 말대로 정정당당히 앞에서 바라볼 용기가 없다면, 그 대신 뒤통수라도 바라보도록 무의식의 심리가 작용한다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좀 비굴하다는 자책감도 없지 않았으나, 뒤통수를 바라보는 편에 우리한 점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첫째로 앞 얼굴 미인은 그리 흔하지 않지만, 뒤통수 미인은 아무데서나 볼 수가 있다. 현대에 발달한 머리 미용술의 인위가 가미된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나, 앞모습의 아름다움에도 화장술의 찬조가 있기는 마찬가지며, 인의든 자연이든 아름다움임에는 틀림이 없다.

둘째로, 노상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의 앞모습이란 잠깐 스쳐가게 마련이므로, 그 아름다움을 포착하자면 긴장된 시선으로 두리번거려야 하지만, 뒷모습의 경우는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게 되므로 느긋하게 포착할 시간의 여유가 있다.

그러나 여기에도 마魔가 끼어들었다. 시쳇말로 유니섹스라던가 뭐 해괴한 풍조가 생겨서 뒤통수만 보고는 남녀를 구별하기가 어렵게 되었을 뿐 아니라, 길게 드리운 굽슬굽슬한 머리가 발걸음의 율동에 맞추어 나풀나풀 춤을 추는 그윽한 모습은 남녀를 불문하고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뒤통수를 믿을 수 없게 되자 관찰의 시선은 자연히 아래로 내려가게 되었다. 아무리 유니섹스가 판을 치고 여자들이 바지를 즐겨 입는다 하더라도 아랫도리의 특징을 말살할 수는 없으리라는 판단이 앞섰던 것은 아니며, 그저 자연히 시선의 높이에 변화가 생겼을 뿐이다. 시선의 높이를 낮춘 뒤에 내가 발견한 실상實相은 아주 간단하고 명료하다. 다리로 걷는 것은 남자이고, 엉덩이로 걷는 것은 여자라는 엄연한 사실.

남자는 제아무리 애를 써도 여자들처럼 그렇게 멋있고 볼품 있는 걸음을 걸을 수 없다. 남자에게는 볼기와 궁둥이가 있을 뿐 엉덩이다운 엉덩이는 없는 까닭에, 여자의 걸음걸이를 모장하고자 각별한 노력을 기울인다 하더라도 헛수고에 그치고 만다. 그러나 여자의 경우는 별다른 교육과정을 밟지 않더라도, 저 원圓에 원이 이어지는 아름다운 보행법을 쉽게 익힐 수가 있는 것이다.

철 따라 유행 따라 바뀌는 옷의 종류와 모양을 따라서, 그 원이 움직이는 모습도 각양각색이다. 걸음걸이는 매양 일반인데 옷의 종류에 따라서 그 효과가 다양하게 나타나는 것인지, 옷과 신에 따라서 보행법에도 약간의 변화를 주는 것인지, 어찌 감히 그것을 물어 볼 수 있으랴.

오늘 우연히 나는 아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무심코 시선이 갔고, 다음에는 잠시 눈여겨 바라보았다. 생각 탓일까, 희끗희끗한 뒷모습이 그지없이 쓸쓸하다. 처음 맞선을 보았을 때, 열아홉 살 처녀의 머리는 두 갈래로 나누어져 고무줄로 묶여 있었다. 그 뒤 어언 38년, 변모한 뒷모습에 흘러간 세월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아내보다도 더 늙었을 내 자신의 뒷모습을 내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것을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 할 것인가? 상관없는 젊은 여인들의 뒷모습을 가지고 어릿광대 같은 농담을 늘어놓을 처지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하기야 세월이 허망하나 차라리 허튼소리로 얼버무리며 잠시 웃어보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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